[신간] 각자의 우주
2026.04.27
각자의 우주
더 잘 머물고 싶어 유영하는 삶의 기록
정영한 산문집

▪ 책 소개
“현실에 더 잘 머물고 싶어 잠시 이방인이 되어 본다”
자유와 안정, 욕망과 권태 사이를 유영하는 정영한의 첫 산문집
우리는 왜 떠나고 싶어지는 걸까. 일상에서 부딪다 보면 다 내려놓고 훌쩍 떠나고 싶어지는 순간들이 있다. 가고 싶은 곳이 생겨서일 때도 있지만 대체로는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 때문인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해도 여러 이유로 완전히 떠날 수는 없으니 대신 우리는 여행을 한다. 이 책은 더 잘 머물기 위해 틈틈이 낯선 곳들을 유영하는 한 사람의 기록이자, 낯설지 않은 우리의 이야기다.
<여행에미치다> PD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을 만큼 여행에 진심인 저자 정영한은 그토록 꿈꾸던 MBC 아나운서가 돼 보통의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바쁜 시간을 쪼개고, 한정된 비용을 살뜰하게 쓰며 여행을 다닌다. 그에게 여행은 그저 여유로운 취미 생활이 아니다. 간절히 꿈꿔 왔던 소망을 이뤘음에도 불구하고 반복되는 일상에 무뎌지는 자신을 다잡고, 나를 잃지 않기 위해 찾은 자신만의 방법이다.
어머니와 단둘이 단칸방에서 생활하며 어렵게 보낸 어린 시절부터, 꿈을 이뤄 기뻐했던 시간들을 지나 노력해도 생각대로 되지 않는 30대 직장인으로서의 고민까지 솔직하게 털어놓은 그의 이야기들은 여행과 함께라 홀가분하고, 직접 찍은 장면들이 더해져 더 선연하다. 여행을 거듭하며 낯선 사람들과 환경을 만날수록 그가 느끼는 건 낯선 이 도시가 누군가에게 삶의 전부이듯, 떠나온 만큼의 거리엔 나의 도시가 있다는 사실이다. 낯선 도시에서 만난 낯선 사람들에게도, 그리고 나와 우리 모두에게도 각자의 우주가 있다는 걸 스스로 이방인이 되어 보고서야 비로소 깨달아 간다.
삶이 고단할 때는 한 발짝 떨어져 이방인이 되어 보는 건 어떨까. 여행을 할 때나 여행이 필요할 때, 이 책을 통해 각자의 우주를 떠올릴 수 있길 바라 본다.
▪ 지은이
정영한
말하고 쓰는 사람.
<여행에미치다> PD를 거쳐 MBC 아나운서가 됐다. 어려웠던 시간들을 자기 확신으로 버텼더니 제법 성과가 났다. 원하던 삶에 가까워지는 듯했으나, 언제부턴가 노력이 결과로 작동하지 않는다. 더 노력하고 스스로를 다그쳐도 마찬가지다. 무엇이 문제일까. 낯선 곳, 이방인이 된 스스로의 모습으로부터 느낀 편안함. 허영이라 여기며 싫어했던 여행에서 그 실마리를 찾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언더독 마인드》가 있다.
인스타그램 @youth.kr
유튜브 @유스
▪ 차례
프롤로그
해피 뉴 이어
설렘의 시작
여행이 싫었다
호의를 의심하는 슬픔
떠나는 용기
괜찮아, 괜찮아
튀르키예의 기쁨
계획 너머의 행복
방심은 금물
여행을 가능케 하는 것
준비되지 않은 휴가자
우연한 행복
이방인이라는 공감대
달리기
역전극
빈티지와 헤리티지
공기의 냄새
리스본 산책
지난 뒤의 의미
사람, 음식, 행복
여행은 살아 보는 것
아님 말고
끝은 없다
지나고 나면
파도에 흘려보내기
꿈꾸듯 포르투
유한해서 소중한 것들
에필로그
▪ 출판사 서평
자유롭고 싶은 마음과 안정하고 싶은 마음 사이
욕망하는 마음과 권태로운 마음 사이
그 마음들을 유영하러 오늘도 떠난다
캐리어를 끌고 공항버스를 타러 갈 때면 왠지 사람들의 부러운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기분이 들고, 주변에서 누가 여행을 간다고 하면 덮어놓고 부러워지곤 한다. 현재가 싫은 것도 아니고, 현실을 충실히 채우는 삶에도 행복을 느끼지만 한 켠에는 왠지 떠나고 싶은 마음이 있다. 왜일까. 어쩌면 다시 돌아왔을 때 ‘역시 집이 최고다!’ 하고 말 결말을 이미 알기 때문 아닐까.
“우리 너무 열심히 살았다”
잘 살아내고 싶은 마음이 만들어 낸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정영한 작가는 MBC 최연소 아나운서라는 타이틀로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사회의 첫발은 <여행에미치다> PD로 출발했다.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여행을 좋아했던 건 아니다. 어머니와 단둘이 보내며 형편이 그리 녹록지 않았던 학창 시절엔 오히려 여행을 사치라 여겼고 싫어했다. 그러다 무작정 떠난 여행에서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생각하게 됐고, 여행에 빠졌다.
“떠나지 못하니 여행이 싫었고,
싫어한 덕분에 일탈의 대상이 됐다.
모순된 자신의 모습을 품어 가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삶을 사랑하게 된다.” _ 본문 중에서
열심히 노력한 끝에 꿈이었던 아나운서가 됐다. 그리고 이제 벌써 5년차 직장인. 분명 전보다 모든 면에서 좋아졌지만 그 안에도 권태가 찾아든다. 삶을 잘 살아내고 싶은 마음은 두려움을 만들고, 자유롭고 싶은 본연의 내가 불쑥 튀어나온다. 그런 그에게 여행이란 그저 잠깐의 행복이 아니다. 현실에 더 잘 머물기 위해 찾은 자신만의 방법이다.
“세상은 넓고 삶은 제각각이다”
아름답게 포착해 낸 다채로운 장소와 사람들을 직접 보는 즐거움
어려웠던 시절부터 현재의 고민에 이르기까지 여행 중에 떠올리는 여러 생각들은 작가의 지난 삶만큼이나 가볍지 않지만, 여행이라는 환경이 그 문장들을 비교적 가볍게 만든다. 한국어를 능숙하게 하는 튀르키예인 압둘라, 처음 만나 짧은 시간에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눈 미즈키, 포르투 거리에서 바이올린 버스킹으로 감동을 준 알폰수와 파브리지오뿐 아니라, 낯선 도시에서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과 다양한 풍경들에 의해 고민은 흩어지고, 경쾌한 정취가 날아든다. 내가 나의 도시에서 현실을 사는 동안, 이 낯선 도시가 여기 누군가에게는 현실이었으리라 생각하면 사람들은 그저 제각각의 슬픔과 기쁨을 안고 산다는 당연한 사실이 새삼스레 다가온다. 책에 있는 모든 사진은 작가가 직접 포착한 여행지의 풍경들이다. 책을 읽는 중간중간 등장하는 사진들 덕에 한 템포 쉴 수 있고, 지난 여행의 추억들도 되짚어 볼 수 있다.
물론 여행만이 방법은 아닐 것이다. 다만 현실에 너무 매몰돼 살다 보면 그 안에 갇혀 다른 것을 보지 못하고 그것이 전부인 양 해 마음을 다치기 쉽다. 우주는 아주 거대하고 그 안에 사는 개인은 먼지보다도 작다 말하지만, 우리 각자는 우주만큼의 거대한 세상을 가졌다. 그러니 ‘나의 우주’를 만끽할 각자의 방법을 찾길, 이 책이 그 방법을 찾는 영감을 줄 수 있길 바란다. 우리가 현실을 더 잘 살아낼 수 있도록.
▪ 책 속으로
그렇게 오늘 처음 만난 낯선 얼굴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를 부르며 1월 1일 새해의 첫날을 맞이했다. 타지에서 파티를 벌이며 떠나보내는 한 해의 마지막 순간은 신기하리만큼 행복했다.
나의 한 해는 늘 잔뜩 힘을 줘 출발했다가 아쉬움과 반성으로 매듭짓는 식이었다. 그래서인지 12월 31일은 이상하게 기운이 없었고, 대체로 집에서 얌전히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싱겁게 보내다 다음 날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하며 애써 의지를 다지는 게 보통이었다. _18쪽
비행기 문이 열리고 밖으로 나가는 순간, 각자의 시곗바늘은 다시금 각기 다른 속도로 흐를 것이다. 도착지에 머무는 시간이 짧을수록 그 속도는 더욱 느리게 기록될 것이고, 또다시 일상을 반복할 사람들에게는 속절없이 지나갈 테다. _27쪽
삶의 선택지들 사이 언제나 돈이 훼방 놓던 시절이라 여행의 낭만도 그저 요행에 불과한 사치였다.
돌아보면 열등감이 빚어 낸 시샘이었다. 남을 부러워하는 내 모습을 용납할 수 없어서 여우의 신 포도마냥, 경험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가치를 일그러뜨림으로써 박탈감을 감춘 셈이다. _31쪽
‘돈 걱정 말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라’는 말은 꽤나 무책임하다. 지긋했던 돈타령 역시 내 성장의 자양분이었으니까. 떠나지 못하니 여행이 싫었고, 싫어한 덕분에 일탈의 대상이 됐다. 모순된 자신의 모습을 품어 가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삶을 사랑하게 된다.
마음껏 여행 다닐 돈과 시간이 있었다면 여행을 업으로 삼을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떠남을 망설일 때는 가격표만 보였지만, 여정에는 헤아릴 수 없는 가치가 숨어 있었다. 떠나고 싶다고 느끼는 것만으로 이유는 충분했다. 여행길에 쓴 백지수표에 값을 적는 건 미래의 나다. _50쪽
플래너를 덮고 계획가 멀어지기를 선언한다. 매일 쓰던 일기장도 날짜가 공란으로 된 것으로 바꾼다. 특별한 이벤트가 없는 날을 발견하면 새로운 일정으로 채우기 급급했던 나를 지우고, 빈칸을 있는 그대로 둔다.
삶의 이상향이 바뀐 건 아니다. 다만 계획으로만 될 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을 뿐이다. 이를 받아들이기까지 일말의 낙담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_82쪽
여행 중에도 일상에서도 늘 좋은 사람들만 만나고, 늘 좋은 경험들만 할 수는 없다. 누군가의 선의를 그 나라의 성격으로 일반화할 수 없듯, 악의도 마찬가지다.
마음을 고쳐먹자 비로소 안탈리아 올드타운의 뷰와 반짝이는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_98쪽
하지만 ‘볼 수 없음’이 ‘다시 찾는 이유’가 된다는 걸, 간직할 수 없어서 더 소중한 머무름이 있다는 걸 이제는 알게 됐다. _139쪽
나의 열심을 누군가 알아주길 기대하면 안 된다는 걸 알고 또 인정하는 사이 허무감이 날아들었다. ‘나 잘하고 있나’에 대한 판단은 불가피하게도 타인의 시선에 달려 있다. 게다가 방송을 업으로 삼고 있다 보니 조직의 평가, 스스로의 만족, 그리고 시청자의 반응이라는 세 개의 꼭짓점이 무게중심을 잡아내려 끝없이 진동한다. 학창 시절과 달리, 사회에서는 ‘좋다’는 한 마디를 듣기 위한 발버둥에 정량화된 기준이 없다. 그래서 가끔은 숫자로 매겨지던 학창 시절의 성적표가 그립기도 하다. 적어도 종이에 찍힌 점수로 우열을 납득할 수 있었으니까. _217쪽
빛나는 대서양의 수평선은커녕 당장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광경에 망연자실해진 사람들의 탄식과 허탈한 웃음이 언덕을 메웠다. 모두가 허탕을 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누구 하나 섭섭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눈도 제대로 뜨기 힘든 돌풍 속에서 우리는 하이파이브를 하고, 마치 재난 영화 같은 배경에서 서로의 추억을 카메라에 담았다. 눈앞엔 짙은 안개가 자욱했지만 행복한 표정의 여행자들 사이에서 나는 분명 타오르는 태양을 봤다. _242~243쪽
내가 만약 단번에 호카곶의 아름다운 전경을 맞이했다면 이 페이지는 인터넷에 널린 수평선 사진 한 장으로 넘어갔을 테지만 세 번의 실패로 인해 이야기가 됐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다. 원하던 결과를 얻지 못했다면 판단의 시기를 유보하면 어떨까. _244쪽
이곳 사람들은 반대였다. 가장 볕이 강하게 드는 곳을 골라 자리를 잡고는 앉거나 누웠다. 바지에 풀물이 드는 것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줄 이어폰을 꽂고 양팔로 뒤통수를 감싸고 누워서는 다리를 거들먹거리거나, 가지런히 모은 두 무릎을 감싸고 멍하니 도로에 지나다니는 차들을 구경하거나, 책으로 얼굴만 가린 채 백팩을 머리에 베고 낮잠을 잤다. ‘자유’라는 단어를 보며 떠올렸던 장면이 바로 여기 있었다. _26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