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보문고
  1. 교보문고 출판
  2. 도서&작가
  3. 북다로그

북다로그

문학의 모든 빛깔이 담긴 기록의 저장소

북다로그는 교보문고의 출판 브랜드 ‘북다’가 운영하는 연재 플랫폼입니다.
‘문학’을 중심으로 기록될 수 있는 다양한 글을 가장 먼저 만나볼 수 있습니다.
매주 소설과 에세이 등 새로운 이야기가 게재됩니다.

움켜쥐는 관계

4화. 4

진수가 시비를 건 이유는 이곤의 머릿속에 잔소리가 가득 차서 입 밖으로 뿜어내기 직전이라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다. 진수는 이곤의 잔소리가 쏟아져 나오기 전에 먼저 선수를 친 것이었다. 옷도 좀 사 입고 그래라. 그렇게 입고 다니면 여자들이 싫어해. 돈 벌어서 다 뭐 해?

 

이래서 언제 돈 모으나 모르겠습니다.

 

이곤은 진수의 가게에 다녀온 다음 날, 뜨거운 태양을 피해 한경대학교 앞 스타벅스에서 신입 사원 예준에게 앞으로 담당하게 될 편의점들의 주요 사항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예준은 이곤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스타벅스 창문 너머로 지나가는 대학생들을 멀뚱히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왜? 무슨 고민 있어? 이곤의 질문에 예준은 이렇게 일해서 언제 돈 모으나 싶어서 걱정이라고 했다. 최 대리님, 안성에서 얼마나 있어야 서울 본사로 갈 수 있나요? 본사는 연봉도 더 높겠죠? 여기서 무슨 일을 어떻게 더 열심히 해야 본사로 갈 수 있을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요. 예준 씨, 잘 들어. 여기 있다가 본사로 가는 방법은 없어. 그런 경우는 지금까지 없었어. 네? 성 과장님께서 열심히 일하다 보면 본사로 갈 기회가 있다고 하셨는데요? 거짓말이야. 예준은 고개를 떨구며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하지 마. 다른 방법이 있으니까. 우선 죽었다 생각하고 그냥 한 2년은 열심히 일하면서 버텨. 경력이 쌓이면 롯데나 신세계 경력직 채용 공고 나는 거 계속 체크하다가 기회 봐서 이직하는 거야. 안 그러면 답이 없어. 가려는 회사들 계속 확인하고. 그쪽에 건너 건너라도 인맥이 있는지 찾아보고. 그리고 다른 건 몰라도 영어는 계속해. 외국인이랑 웃으면서 농담할 수 있을 정도로, 알았지? 와아. 그럼 최 대리님도 이직 준비하고 계시나요? 예준의 질문에 이곤은 뜨끔했다. 예준은 이곤의 표정을 보고 뭔가 말실수했다는 걸 느꼈다.

 

아아, 맞다. 최 대리님, 나 전무님의 조카라고 하셨죠?

 

예준의 말에 이곤은 깜짝 놀랐다. 그걸 어떻게 알아? 왜 몰라요. 회사 사람들 다 알던데요. 성 과장님도 그렇고 나현 선배도 그렇고, 최 대리님 얘기만 나오면 그 얘기 하잖아요. 보니까 성이 다르신데? 그럼 나 전무님이 외삼촌이신 거예요? 그나저나 나현 선배가 최 대리님이 전무님 조카라서 대리를 빨리 달았다고 그러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회사에 최 대리님처럼 일 열심히 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거든요. 성 과장님은 일도 안 하시고 여직원들이랑 놀기만 하면서, 열심히 하다 보면 본사 갈 수 있다고 거짓말이나 하시고. 에휴. 월급이라도 많아야 열심히 하지. 이곤은 예준을 빤히 바라보았다. 얘는 왜 나한테 이런 소리를 하는 거지? 아무리 요즘 애들이 개념이 없다고 하지만, 입사한 지 1년도 안 된 신입이 직장 상사 앞에서 다른 상사와 회사 욕을 해도 되는 거야? 게다가 내가 전무 조카라는 걸 알면서? 잠깐. 내가 지금 얘 걱정할 처지가 아니잖아. 얘는 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상황 파악 끝내고 탈출할 생각 하는데. 최 대리님은 돈 많이 모으셨겠어요. 옷도 잘 안 사시는 것 같고, 식사도 매일 편의점 음식 드시잖아요. 이곤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돈을 얼마나 모았지?

 

엄마의 권유로 안성으로 내려와서 외삼촌의 말대로 이 회사에 들어올 때만 해도 딱 1년만 있자고 결심해 놓고 어느새 7년이나 지났네. 이곤이 7년 동안 모은 돈은 겨우 3천만 원이었다. 입사한 첫해는 돈을 못 모았고 그다음 해부터 한 달에 40만 원씩 적금을 부어 이자를 포함해 1년에 5백만 원, 6년 동안 3천만 원을 모은 것이다. 이렇게 모아서 언제 형한테 돈을 갚지? 6년에 3천이면, 20년을 일해야 1억이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그동안 너무 나태해져 있었어. 이러다가 성 과장처럼 되는 건 시간문제다. 성 과장은 결혼해서 애라도 있지. 난 이러다가 결혼도 못 해. 움직여야 해. 감나무 밑에 누워서 감 떨어지기만 기다릴 수는 없어. 한심하다고 생각했던 진수 형도 가게를 차렸잖아. 남 욕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일어나서 움직이자. 예준 씨, 고마워! 예? 뭐가요? 아무튼 고마워. 나중에 밥 한번 살게. 이곤은 벌떡 일어나 스타벅스를 나와 진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진수 형. 나랑 같이해.

 

뭐? 지금 몇 시야? 진수는 잠결에 이곤의 전화를 받고 깜짝 놀랐다. 어어? 벌써 점심시간이 지났네. 밤 장사 하니까 밤낮이 바뀌어서 죽겠다. 그런데 뭐라고? 형이 어제 나랑 같이 일하자고 했잖아. 같이 하자고. 어어. 같이하면 좋지. 회사는 어떡하고? 진수가 이곤에게 같이 일하자고 한 것은 빈말이었다. 이곤이 성실하고 일은 잘하지만, 너무 부지런한 성격에 잔소리까지 심해서 같이 일하기는 피곤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너 점심은 먹었냐? 아후, 피곤해. 어제 손님들이랑 술을 좀 먹었더니 죽겠다. 그나저나 점심은 뭐 먹지. 날도 더운데 콩국수 같은 거나 먹을까?

 

매출, 두 배로 올려 줄게.

 

뭐라고? 내가 형네 가게, 지금보다 매출 두 배로 올려 준다고. 어제 형 장사하는 거 보고 대충 계산해 봤는데. 충분히 가능해. 그리고 내가 첫 달 월급 안 받을게. 매출 나오는 거 보고 기존보다 두 배 넘게 나오면 그때부터 월급 줘. 진수는 솔깃한 이곤의 제안에,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어떻게 매출을 두 배로 올려? 그건 내가 가서 얘기해 줄게. 그래서 언제 올 건데? 오늘 또 올 거야? 당장은 못 가지. 회사랑 여기 집 정리하고, 형네 가게 근처에 집 얻고, 그러면 아마 겨울은 되어야 할 거야. 뭐야? 아직 멀었네. 진수는 김이 팍 빠졌다. 그러나 생각보다 시간은 빨랐다. 진수의 가게는 맥주 가게라 여름에는 장사가 적당히 되었지만, 가을이 되자 손님이 뜸해졌다. 이곤이 오면 오는 거고, 아니면 말고, 했던 진수의 생각은 날씨처럼 바뀌었다. 손님이 뜸해지자, 진수가 한 달에 가져가는 돈이 확 줄었다. 대학교 여름방학까지 끝나서 아르바이트는 더욱더 구하기 힘들어졌다. 이곤과 같이 일하는 걸 고민하던 진수는 결국엔 이곤에게 더 빨리 올 수 없냐며 재촉까지 하게 되었다. 형, 조금만 참아. 제대로 정리 안 하고 서울 올라가면 더 피곤해져. 내가 늦어도 크리스마스까지는 갈게. 뭐? 크리스마스? 이곤아, 나 요새 계속 마이너스야. 이러다가 너 오기 전에 가게 내놔야 할지도 몰라. 형, 나도 급해. 나도 지금까지 월급의 반을 외삼촌한테 뺏기느라 모은 돈도 없어. 에엥? 월급의 반을 왜 외삼촌한테 뺏겨? 아무튼 그런 게 있어. 그러니까 형도 대출이라도 받아서 겨울까지 좀 버티고 있어. 크리스마스까지 얼마 안 남았잖아. 내가 형네 가게 놀러 갔던 게 여름인데 벌써 겨울이야. 시간 금방 가.

 

3. 만남

 

우리 버스는 잠시 후 목적지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졸고 있던 이곤은 안내 방송을 듣고 정신을 차렸다. 밖을 보니 어느새 버스는 서울에 진입해 있었다. 이곤은 서울고속버스터미널에 내려 택시를 잡아탔다. 평소 같으면 지하철을 탔겠지만, 안성에서 가져온 짐들 때문에 도저히 지하철을 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기사님, 화곡역 4번 출구에서 골목 쪽으로 들어가다 보시면 공원 하나 나오거든요. 거기에 세워 주세요. 이곤은 택시를 타고 가며 진수에게 전화했다. 형, 택시 타고 가는 길이거든. 집에다 짐 놔두고 바로 가게로 갈게. 이곤은 택시에서 내려 트렁크와 보스턴백을 들고 10월 말에 계약해 뒀던 오피스텔로 들어갔다. 말만 오피스텔이지 사실 다세대 빌라였다. 엘리베이터도 없어서 이곤은 401호까지 무거운 트렁크와 보스턴백을 들고 끙끙대며 계단을 올랐다. 401호 앞에 도착하니 크리스마스이브인데도 이마에서 땀이 흘렀다. 이곤은 공인중개사에서 알려 준 대로 도어록 비밀번호를 눌렀다.

 

꺄아아아악!

 

 

 

이곤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잠옷 바지와 티셔츠 차림의 20대 여자가 비명을 질러 댔다. 이곤은 화들짝 놀라 죄송합니다! 하며 문을 닫았다. 어? 뭐야? 이곤은 현관문에 붙어 있는 호수를 살폈다. 401호. 맞는데? 잠깐! 맞으니까 도어록 비밀번호로 문이 열렸겠지? 이곤은 다시 벨을 눌렀다. 문 안쪽에서 잠금 걸쇠 거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요. 잠깐 문 좀 열어 보세요.누구신데요? 저 여기 이사 오기로 한 사람인데요. 왜 이사 안 가셨어요? 이사요? 무슨 이사요? 순간 이곤의 등에 소름이 쫙 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