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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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3
이곤은 따뜻한 버스에서 습기가 찬 창문 밖으로 멀리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커피숍 남자와 여자의 실루엣을 바라보았다. 이곤은 이 분위기를 이어 가기 위해 이어폰을 끼고 핸드폰을 켜서 러브 액츄얼리 OST를 검색하려고 했다.
야. 얼굴은 보고 가야 할 거 아냐. 앞으로 나랑 연락 안 할 거야?
마침 그때 도착한 성 과장의 카톡이 이곤의 기분을 싹둑 잘라 버렸다.
이곤은 성 과장이 왜 저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사직서도 줬고, 인수인계도 한 달에 걸쳐서 다 끝냈다. 담당하던 편의점의 정보를 매장 평수와 주요 고객층, 주력 상품, 손님이 몰리는 시간, 아르바이트 직원들 소개. 게다가 각 지점장들의 주소와 연락처와 이메일은 물론, 출근 시간 및 식사 시간, 가족 관계, 성격, 앓고 있는 지병, MBTI까지 엑셀로 정리해서 쓰던 노트북 바탕 화면에 저장해 놓고 나왔다. 그러나 성 과장은 이곤이 정말로 회사를 그만둘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왜 내가 회사를 그만두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시지? 자기가 잡으면 내가 잡힐 거라고 생각하셨나?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야? 우리가 그렇게 친하지도 않았잖아? 그리고 앞으로 연락할 일은 당연히 없지. 인수인계를 완벽하게 하고 나왔는데 연락할 일이 뭐 있겠어. 이곤은 성 과장이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그 나이대 사람답다고 생각했다. 이곤이 보기에 성 과장은 자기 일은 등한시한 채 회사를 돌아다니며 친목질만 하는 듯 보였다. 승진에도 별 관심 없고 그냥 하루하루 근근이 버티는 것 같았다. 결혼까지 한 사람이 매일 여직원들과 수다를 떨었다. 여직원들이 이곤을 욕할 때면 성 과장은 걔가 좀 이상하지, 하며 맞장구를 쳤었다. 간혹 이곤이 너무 깐깐하다며 투덜거리는 점주들을 만날 때도 성 과장은 글쎄, 저놈이 좀 그래요. 저도 살면서 저렇게 융통성 없는 놈은 처음 봅니다, 하며 점주들과 같이 이곤의 흉을 봤다. 이곤은 그런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나쁜 감정이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그냥 처세술의 일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성 과장에게 실력과 성실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이곤은 성 과장과 그다지 친해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성 과장은 이곤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곤이 성 과장을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부분은 이곤이 회사를 그만두는 게 여직원들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여직원들이 그러는 거 하루이틀도 아니고. 그래서 그만둘 거였으면 몇 년 전에 그만뒀지. 그리고 세상에 여직원들이 싫어한다고 회사를 나가는 놈이 어디 있어?
그놈 회사 절대 못 나가. 그럴 일이 있어.
성 과장은 그렇게 말하는 나 전무의 말을 믿었다. 나 전무는 이곤의 외삼촌이었다. 그러나 이곤이 정말로 회사를 그만두자, 나 전무는 성 과장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그런 멍청한 놈 하나 잘 구슬려서 붙잡아 놓지도 못하고 뭐 한 거야? 빨리 최이곤 데리고 와! 성 과장은 이곤이 살고 있던 옥탑방 문을 열어 보고는 깜짝 놀랐다. 방에는 침대와 책상만 빼고 다른 짐은 전부 빠져 있었다. 진짜 갔구나. 깜짝 놀란 성 과장은 나 전무에게 그 사실을 알리면서 이곤이 부모님의 갈빗집을 물려받을 거라는 얘기를 했었다고 전했다. 이곤이 그놈, 자기 아빠가 형 주려던 돈을 중간에 슈킹 까고 튀어서 가족이랑 연락 끊었다고 했잖아. 그놈 집에 들어가면 자기 형한테 맞아 죽어. 절대 집에 갔을 리 없어. 다른 데 어디로 갔는지 찾아봐. 성 과장은 핸드폰도 꺼 놓고 사라진 이곤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막막했다. 에이 모르겠다. 그냥 며칠 있다가 흥신소랑 심부름센터 몇 군데 찔러 봤는데 아무 데서도 못 찾는다더라, 그렇게 얘기해야지. 그나저나 전무님은 왜 그렇게 최 대리를 붙잡아 두려고 하시는 거지? 아무리 최 대리 외삼촌이라지만, 최 대리도 이제 나이가 서른이 넘었는데. 알아서 살게 놔둬야 하는 거 아냐?
이야. 잘 살고 있네.
지난여름, 이곤은 진수의 카톡 프로필이 바뀐 걸 보자마자 곧바로 진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야 잘 살지. 너는 잘 사냐? 진수는 이곤의 군대 선임이었다. 석 달 선임이었지만, 나이는 네 살이 더 많았다. 진수는 이곤이 훈련소에서 오자마자 자기 일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의 일까지 맡아서 빠릿빠릿 해내는 걸 보고 일 시키기 좋은 놈이라고 생각했었다. 처음에 이곤은 진수와 가깝게 지내고 싶지 않았었다. 게으르고 답답해 보이는 데다 일을 시키기 위해 자꾸 친한 척 들러붙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외로 진수는 계급과 나이에 비해 권위의식이 없었고 항상 이곤의 일 처리가 깔끔하다며 주변에 이곤의 칭찬을 자주 했었다. 이곤은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을 알아주는 진수가 점점 마음에 들었다. 그 덕분에 진수는 이곤이 제대 후 유일하게 연락하는 사람이 되었다. 어느 날 우연히 본 진수의 카톡 프로필은 맥주와땅콩이라는 간판 아래 활짝 웃는 진수 얼굴로 바뀌어 있었고, 그 아래 한진수 드디어 사장 되다! 라는 상태 메시지까지 보였다. 이곤은 그걸 보자마자 바로 진수에게 전화를 한 것이었다. 형, 가게 차린 거야? 그래 인마. 서울 올 일 있으면 한번 놀러 와. 놀러 오라는 진수의 말에 융통성 없는 이곤은 바로 휴가를 내고 화곡동에 있는 진수의 가게를 찾아갔다. 화곡역 3번 출구로 나와서 걷다 보면 치유본한방병원이 보여. 그 골목으로 들어오면 편의점 있거든. 거기서 좌회전해서 쭉 오면 보일 거야. 못 찾으면 전화해.
딱 시간 맞춰 왔네?
이곤이 진수의 가게에 도착하자 진수는 웃는 얼굴로 이곤을 맞았다. 하지만 이곤은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이곤은 뜨거운 여름날 집에서 버스를 타고 안성종합버스터미널까지 가서 고속버스로 갈아탄 뒤 두 시간을 달려 서울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한 다음, 지하철 9호선을 타고 가다가 여의도역에서 5호선으로 갈아타고는 화곡역에 도착해서 진수의 가게까지 걸어왔다. 오전 11시에 출발했으나 도착하니 오후 5시가 다 되었다. 밖에 엄청 덥지? 이쪽 에어컨 옆에 앉아. 생맥주 한 잔 줄까? 됐어. 지금 7월이잖아. 나 홀수 달에는 술 안 마셔. 너 아직도 그거 하냐? 진수는 툴툴대며 캔 콜라를 가져다줬다. 이곤은 콜라를 벌컥벌컥 마시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둘러보니 진수의 가게는 4인용 테이블 여섯 개와 6인용 테이블 한 개가 전부인 자그마한 호프집이었다. 진수 형, 가게는 어떻게 차리게 된 거야? 임대료는?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영업해? 월수입은 평균 어느 정도 돼? 매출은? 순이익은? 메뉴판 좀 줘 봐. 여기 주력 안주는 뭐야? 종업원은 몇 명 써? 오다 보니까 큰길 쪽에 봉구비어랑 금별맥주도 있고 다른 호프집도 좀 있던데, 여기까지 손님이 와? 야야. 숨 좀 쉬고 말해. 너 나 보러 온 거야? 시장 조사 나온 거야? 진수의 물음에 이곤은 민망한 듯 테이블에 있던 땅콩을 집어 먹었다. 이곤이 가게를 둘러보니 40, 50대 남자 손님들이 대부분이었다. 손님들은 대부분 생맥주에 마른안주를 시켜 먹으며 시간을 보내다가 갔다. 주력 안주라는 한방통닭구이는 아무도 시켜 먹지 않았다. 이곤은 이래서 임대료나 제대로 내려나 싶었다.
너 회사 때려치우고 여기서 나랑 일할래?
형이랑 같이 일하자고? 누구 속 터져서 죽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이곤의 말에 진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요새 왜 이렇게 사람 구하기가 힘드냐. 가게 오픈하고는 장사가 좀 됐는데, 사람이 안 구해져. 혼자 하려니까 너무 힘들다. 돈을 많이 줘야 일하러 오지. 돈은 많이 주지. 얼마 주는데? 250 정도. 에엥? 250에도 안 와? 돈이 문제가 아니야. 여기 서빙하는 애 구하잖아? 아저씨들이 얼마나 찝쩍대는데. 그러니까 못 버티고 나가는 거야. 차라리 돈 좀 덜 받고 편의점에서 일하는 게 낫대. 그래서 남자애를 구했더니 손님들이 왜 남자가 서빙하냐고 난리고. 피곤해 죽겠다. 형이 고생이 많네.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어. 이곤은 맥주를 마시면서 머릿속으로 만약 자신이 이 호프집을 운영한다면 어떻게 할지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대충 계산해 보니 지금보다 매출을 최소 두 배 정도 올릴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이곤은 그 방법을 진수에게 말하지 않았다. 게으른 진수는 절대 이곤의 말대로 하지 않을 걸 알았기 때문이다. 진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가게를 훑어보는 이곤에게 갑자기 시비를 걸었다.
야, 근데 너는 회사에서 월급 안 받냐? 옷이 그게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