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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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2
오빠가 간다고 했잖아!
남자가 외치는 소리에 정신을 차려 보니 여자 친구로 보이는 여자가 어느새 남자 옆에 앉아 있었다. 커피숍 직원은 약간 놀란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호통에 여자의 눈가가 젖어 들기 시작했다. 때마침 흘러나오던 캐럴은 고요한 밤 거룩한 밤에서 산타 할아버지 우리 마을 오시네, 로 넘어갔고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가사가 나오자 화들짝 놀란 직원이 당황한 나머지 음악을 꺼 버렸다. 커피숍은 정적에 휩싸였다. 여자는 눈물을 참고 남자를 노려보았다. 가긴 어딜 가는데? 서울 간다고, 서울! 왜 계속 물어봐? 서울 어디? 어딘지는 알아서 뭐 하게? 남자는 화를 가라앉히려는 듯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쭉 들이켜고는 말을 이었다. 돈 갚는다고. 내가 떼어먹는대? 겨우 돈 5백 갖고 진짜 사람 쪽팔리게 하네. 서울에 가서 일을 해야 돈을 벌고. 그래야 너한테 돈을 갚을 거 아니야.
누가 돈 갚으래?
돈 안 갚아도 돼. 그거 그냥 오빠 쓰라고 준 거야. 이곤은 여자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돈 5백을 그냥 쓰라고 줬다고? 미친 거 아니야? 평소 남의 싸움에 관심 없는 이곤이었지만, 여자가 왜 남자에게 돈 5백을 줬는지 궁금해졌다. 이곤은 꺼져 있는 핸드폰 액정을 보는 척하며 청각을 커플 쪽으로 집중시켰다. 여자는 남자의 팔을 붙잡았다. 오빠. 그냥 나랑 있으면 안 돼? 크리스마스잖아. 여자의 말에 남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남자의 미간에는 짜증이 가득했고, 여자의 미간에는 애증이 가득했다. 크리스마스면 뭐? 크리스마스가 돈 벌어다 줘? 그리고 내가 왜 크리스마스에 너랑 같이 있냐? 남자의 말에 여자의 왼쪽 눈에서 참았던 눈물 한 방울이 똑 떨어졌다. 남자는 여자의 눈물을 보기 힘들었는지 에이씨, 하며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여자는 다급하게 남자의 몽클레르 패딩 소매를 움켜잡았다. 오빠 어디 가? 담배 피우러! 남자의 말에 여자는 조심스레 잡고 있던 남자의 소매를 놓았다. 남자는 한숨을 쉬고는 커피숍 밖으로 나갔다. 남자가 나가자, 여자는 눈물을 닦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테이블 모서리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다 다시 울컥하여 얼굴을 감싸 쥐고 참았던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한번 해 봐?
평소의 이곤이었으면 절대로 끼어들지 않았을 상황이지만, 이곤은 여자가 측은했다. 둘이 싸우는 걸 지켜보며 여자가 남자에게 돈을 준 게 설마 사랑 때문은 아니겠지? 했지만, 결국은 사랑 때문인 것 같았다. 그러고는 이건 지능의 문제라고 결론 내렸다. 여자의 지능이 아니라 남자의 지능이었다. 여자야 사랑에 빠져서 이성을 잃었다 치지만, 5백을 그냥 줄 수 있는 여자를 저렇게 대하는 남자는 멍청하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여자는 갈색 곰 인형이 그려진 까만 스웨터와 블랙 진 차림에, 기장이 짧은 크림색 노스페이스 패딩을 입고 있었다. 이곤은 여자의 크림색 노스페이스 패딩을 보며 생각했다. 저 패딩, 나현 씨가 입고 다니는 거랑 똑같잖아? 그나저나 왜 저런 여자는 내 주변엔 없지? 나 같으면 매일 업고 다니겠다. 5백이나 줬는데.
그래. 한번 해 보자. 크리스마스잖아.
이곤은 안젤리나에게 받은 능력을 써서 울고 있는 여자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하기로 결심했다. 능력을 받은 지 몇 년이나 지났지만, 써먹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쓸 곳도 없었고, 쓰기도 애매했다. 그리고 이 능력이 제대로 작동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이렇게 테스트 한번 해 보는 거지 뭐. 이곤은 자기 오른 손바닥에 혹시 땀이 났을까 싶어 티슈로 쓱쓱 닦은 뒤 자리에서 일어나 여자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얼굴을 가리며 울고 있는 여자의 손목을 확 움켜잡은 뒤 소리쳤다. 나현 씨! 얼굴 가리면 내가 모를 줄 알아? 여자는 화들짝 놀라 이곤을 쳐다보았다. 이곤은 움켜잡은 여자의 손목에서 재빨리 DNA를 흡입했다. 오른손에 여자의 DNA가 흡입된 게 느껴졌다. 이곤은 여자의 손목을 놓아주고는 당황한 것처럼 연기를 시작했다. 어어? 죄송합니다. 제가 아는 사람인 줄 알고. 실례했습니다. 얼굴을 가리고 계셔서, 우리 회사 직원이 저를 보고 얼굴을 숨긴 줄 알고. 정말 죄송합니다. 패딩이 똑같아서 착각했어요. 이곤의 말에 여자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민망한 듯 눈물을 닦았다. 아아. 괜찮아요. 이곤은 다시 한번 죄송하다고 사과한 뒤 여자가 들으라는 듯 저 색깔 노스페이스가 올해 유행인가? 라며 구시렁거리고는 후다닥 자리를 떴다. 그러곤 커피숍 밖으로 나와 터미널에 있는 편의점으로 향했다. 담배 하나 주세요. 어떤 거로 드릴까요? 어어. 저거 주세요. 편의점 주인 아주머니는 이곤이 가리킨 말보로 레드를 건네주었다. 이곤은 담배를 들고 터미널 밖으로 나와 남자를 찾았다. 남자는 흡연 구역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이곤은 재빨리 뛰어가 남자 근처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는 괜히 라이터를 찾는 척했다. 저기 죄송한데 불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이곤의 계획은 이랬다. 남자에게 담뱃불을 빌릴 때, 겨울바람에 불이 꺼지지 않도록 라이터를 켠 남자의 손을 자기 손으로 감쌀 생각이었다. 그러면서 여자에게 흡입했던 DNA를 남자에게 주입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계획이 틀어졌다. 남자는 들고 있던 전자 담배를 이곤에게 보여 주었다. 전자 담배잖아. 전자 담배를 생각 못 했네. 어쩌지? 에라 모르겠다. 이곤은 전자 담배를 들고 있던 남자의 손을 덥석 잡았다.
어어. 이거 그 구하기 힘들다는 아이코스 플래티넘 스페셜 에디션 아니에요?
아닌데요. 남자는 이 병신은 뭐야? 하는 표정으로 이곤의 손을 뿌리쳤다. 아아. 아니구나. 죄송합니다. 이곤은 남자가 들으라는 듯 혼잣말로 에이, 라이터 또 사야 되잖아, 라고 하며 흡연 구역을 나왔다. 이곤은 남자의 손을 잡을 때, 카페에서 흡입했던 여자의 DNA를 남자에게 주입했다. 짧은 찰나였지만, 손에서 여자의 DNA가 느껴지지 않는 걸 보니 확실히 주입된 것 같았다. 이거 진짜 되려나?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 이곤은 커피숍으로 돌아와 자신의 캐리어와 보스턴백, 인간관계론을 챙겨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커피숍 밖으로 나와 유리 너머로 커피숍 안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 남자가 돌아와 여자를 바라보더니 옆에 가서 앉아 팔로 여자의 어깨를 감쌌다.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은 담배를 피우러 나가기 전과 달랐다. 미간에서 짜증이 사라진 상태였다. 남자가 뭐라고 말하자 여자는 활짝 웃으며 눈물을 흘렸다. 남자는 여자의 눈물을 닦아 주었고, 여자는 그런 남자의 품에 안겼다. 남자는 자신에게 안긴 여자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고는 여자를 꽉 끌어안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곤은 놀라서 자기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이게 되네. 안젤리나가 거짓말한 게 아니잖아. 이걸로 돈 좀 벌 수 있겠는데? 그때 갑자기 어디서 천사의 나팔 소리 같은 게 들렸다.
빰빠밤 빰빰 빰 빠바
천사의 나팔 소리는 커피숍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이었다. 스피커에서는 비틀스의 All You Need Is Love가 흘러나왔다. 이곤은 화들짝 놀라 커피숍 카운터 쪽을 보았다. 커피숍 직원은 미소를 지으며 커플을 지켜보다 이곤과 눈이 마주쳤다. 이곤은 직원에게 엄지를 치켜올렸다. 직원도 조심스레 이곤을 향해 양손으로 엄지를 치켜올리며 활짝 웃었다. 크리스마스에, 사랑하는 커플에, 비틀스까지.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곤은 문뜩 예전에 보았던 영화 러브 액츄얼리가 떠올랐다. 눈까지 온다면 더없이 좋겠다 싶었다가 눈이 오면 차가 막힐 테니 안 오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곤은 보스턴백을 얹어 놓은 캐리어를 끌고 서울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승차장으로 가면서 커피숍 직원의 탁월했던 음악 선곡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2. 탈출
야! 너 오는 거야? 마는 거야?
이곤은 버스에 오르자마자 핸드폰을 켰다. 그러자 바로 진수에게 전화가 왔다. 지금 서울 가는 버스 탔어. 핸드폰은 왜 꺼 놨어? 무슨 일 생긴 줄 알았잖아. 진짜 오는 거 맞지? 진수 형, 나 최이곤이야. 한번 한 약속은 꼭 지키는 거 알잖아. 걱정하지 마. 지금 출발하니까 서울 도착하면 대충 1시 정도 될 테고, 화곡동까지 적어도 3시에는 도착하겠네. 집에다가 짐 놔두고 가면 넉넉하게 4시 전에는 갈 수 있을 거야. 조심해서 오고 도착하면 전화해. 전화기 꺼 놓지 말고. 알았지? 알았어. 이곤이 통화를 마치자, 버스가 문을 닫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버스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덕분에 서울에 간다던 커피숍 남자가 버스에 타지 않았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