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다로그
문학의 모든 빛깔이 담긴 기록의 저장소
북다로그는 교보문고의 출판 브랜드 ‘북다’가 운영하는 연재 플랫폼입니다.
‘문학’을 중심으로 기록될 수 있는 다양한 글을 가장 먼저 만나볼 수 있습니다.
매주 소설과 에세이 등 새로운 이야기가 게재됩니다.
1화. 1
하아,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이곤은 읽고 있던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을 덮었다. 에이. 왜 하필 이런 노래를 틀어? 이곤은 안성종합버스터미널 역 내부에 있는 커피숍에 앉아 있었다. 손바닥만 한 터미널에 식당들은 모두 닫혀 있었고 문을 연 곳이라고는 구멍가게 같은 편의점 외엔 보이지 않았다. 날이 너무 추워서 몸 녹일 곳을 찾아보던 이곤은 대합실 끄트머리 쪽에 마음에그리다, 라는 이름의 커피숍을 발견했다. 90년대 대학로에서나 봤을 법한 상호가 마음에 들진 않았으나 의외로 내부는 그럴듯했다. 넓은 공간에 세련된 실내 장식. 무엇보다도 의자가 푹신하고 안락했다. 주문한 바닐라라테도 이곤이 가장 좋아하는 스타벅스 더블샷 에스프레소 캔 커피의 맛과 비슷해서 마음에 들었다. 이곤은 그제야 90년대에 멈춰 있는 것 같은 안성종합버스터미널에서 현시대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음악이 흘러나오기 전까지는 그랬었다.
차라리 캐럴을 틀지. 크리스마스에 90년대 가요가 뭐야.
흘러나오는 곡은 이상은의 언젠가는, 이었다. 이곤이 이 노래를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분위기에 맞지도 않을뿐더러 책을 읽을 때 가사가 있는 노래를 들으면 자기도 모르게 따라 부르게 되어 집중할 수 없었다. 게다가 아는 노래라면 더욱더 그럴 가능성이 컸다. 이런 커피숍에서는 라운지 음악이나 재즈 같은 걸 틀어야 하는 거 아냐? 그러다 책 표지의 데일 카네기와 눈이 마주쳤다. 데일 카네기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방금까지 내 책을 읽어 놓고도 그런 생각을 해? 라고 하는 듯 보였다. 이곤은 인간관계론을 읽으며, 이거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면 친절해야 한다는 내용이잖아? 다 아는 내용을 뭐 이렇게 길게 썼어? 하고 생각했다. 이곤은 커피숍 카운터에 있는 직원을 바라보았다.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직원은 기분 좋은 표정으로 노래를 흥얼거리며 에스프레소를 내리고 있었다. 그래. 쟤도 크리스마스이브에 버스터미널 커피숍에서 일하고 싶진 않았겠지. 어쩌면 이 노래가 자신에게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일지도 모르잖아. 그런데 저 나이면 이런 노래 말고 BTS나 뉴진스를 들어야 하는 거 아냐? 취향 특이하네.
주문하신 아이스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직원이 소리치자, 커피숍 구석에 앉아 있던 남자가 일어나 카운터로 갔다. 그 남자는 이곤을 제외하면 커피숍의 유일한 손님이었다. 남자는 서른셋인 이곤보다 서너 살 많아 보였다. 어디서 막노동이라도 할 것 같은 분위기의 남자는 어울리지도 않게 몽클레르 패딩에 구찌 모자를 쓰고 있었다. 이곤은 문뜩 자신의 옷차림을 훑어보았다. 회사에 출근해야 해서 머리는 단정하게 잘랐지만, 오래 입어서 허옇게 바랜 검은 패딩에 홈플러스에서 세일할 때 산 짙은 색 리바이스 청바지가 패션에 조금도 관심 없다는 걸 보여 주고 있었다. 남자는 커피를 가지러 가며 이곤이 신고 있는, 뒤꿈치가 다 닳은 검은색 아디다스 슈퍼스타를 힐끔 보았다. 남자는 검은색과 빨간색이 섞인 에어조던을 신고 있었다. 남자는 카운터에서 커피를 챙기며 직원을 불렀다. 저기요. 이런 옛날 노래 말고 차라리 캐럴이나 틀어요. 크리스마스잖아. 아아. 네. 알겠습니다. 그럼 센스 있는 곡으로 부탁해요. 남자가 능글맞은 미소를 지은 뒤 커피를 가지고 돌아가자, 직원은 음악을 바꾸기 위해 노트북이 놓인 곳으로 후다닥 뛰어갔다. 그러더니 갑자기 나오던 노래가 뚝 끊기고 바로 재즈풍의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나왔다. 아직 점심시간도 안 됐는데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라니. 아니나 다를까 남자는 빨대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쭉 마시다가 음악이 들리자, 한심하다는 듯 직원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체념한 듯 한숨을 쉬고는 누구를 기다리는 듯 커피숍 밖을 살피다가 결국 핸드폰으로 눈을 돌렸다. 이곤도 핸드폰이나 보며 시간을 때울까 하다가 핸드폰을 꺼 두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침부터 외삼촌과 성 과장에게 계속 전화가 왔기 때문이다. 문자도 계속 왔다.
최 대리, 갑자기 무슨 퇴사야?
성 과장은 이곤이 내민 사직서를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너 여기 그만두고 어디 가려고? 이곤은 평소처럼 무표정하게 성 과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부모님 있는 데로 가려고요. 부모님? 너 부모님이랑 연락 끊었다며. 다시 연락해? 가서 뭐 하려고? 그냥 뭐 부모님이 하시는 갈빗집이나 물려받아야죠. 성 과장은 착잡한 표정으로 이곤을 바라보다 다시 말을 꺼냈다. 최 대리, 여직원들이 뒤에서 수군거리고 그러는 거 기분 나쁜 건 이해해. 그런 거 그냥 무시해. 쟤들이 내 욕은 안 할 것 같아? 그런 거 일일이 다 기분 나빠 하면 사회생활 못 해. 성 과장은 대답 없는 이곤을 물끄러미 보다가 책꽂이에서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을 꺼내 이곤에게 건넸다. 이게 괜히 베스트셀러가 아니더라고. 인간관계 잘하는 법? 이 책 읽어 보면 답이 다 나와 있어. 이곤은 성 과장이 내미는 책을 받고 돌아갔다. 성 과장이 이곤의 등에 대고 휴가 남은 거나 쓰든가, 라고 했으나 이곤은 대답이 없었다.
여직원들은 무슨.
이곤은 회사 여직원들이 뒤에서 수군거리는 게 하나도 거슬리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에게 호감을 느끼지 않는 여직원들에게 고마웠다. 여직원들은 이곤이 건강을 생각해서 홀수 달에 술을 마시지 않는 것과 대화하는 도중에 뜬금없이 랩으로 대답하는 것, 마지막으로 말도 안 되는 개그를 하는 걸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러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이곤의 행동들이 왜 그런대? 좀 그렇지 않아? 몰라? 왜 저래? 또 그래? 네가 가서 뭐라고 좀 해 봐. 됐어. 신경 쓰지 마, 까지 진행되자 여직원들 사이에서 이곤의 평판은 이상하다, 에서 기분 나쁘다, 로 바뀌었다. 하지만 이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이곤은 여직원들에게 잘 보일 생각이 없었다. 과장님, 저 진짜 나현 언니 때문에 힘들어 죽겠어요, 하며 눈물을 짜내는 여직원을 다독이고. 과장님, 요새 애들은 왜 자기들이 잘못해 놓고 뭐라고 좀 하면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지 모르겠어요, 라고 하는 나현에게 맞장구를 쳐 주는 성 과장을 보면서 더욱더 여직원들과는 엮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게다가 편의점 슈퍼바이저 특성상 외부로 돌아다닐 일이 많아 여직원들과는 엮일 일도 없었다. 성 과장은 간혹 이곤을 붙들고 연애는 하고 있느냐? 젊은 사람이 연애를 해야 한다. 나현 씨 어떠냐? 나현 씨가 성격이 좀 드세긴 하지만, 저런 사람이 나중에 남편한테 잘한다. 내가 여자 보는 눈이 좀 있다. 아니면 마음에 둔 다른 여직원이 있느냐? 얘기만 하면 내가 자리를 마련해 보겠다, 라며 시답지 않은 소리를 해 댔다. 그럴 때면 이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외근을 나갔다.
최 대리가 건배사 한번 하지.
몇 년 전 개발팀, 영업팀 단체 회식 때 성 과장은 이곤에게 건배사를 부탁했었다. 이곤은 어떤 건배사를 할까, 하다가 앞에 보이는 처음처럼 소주병을 들고 처음처럼 모델인 수지의 광고를 흉내 내며 당연히 첫 잔은 원샷이겠죠? 하며 건배사를 외쳤다. 그러자 분위기가 싸해졌었다. 여직원들은 경멸 어린 시선으로 이곤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멀리서 상무님이 그런 이곤을 보며 피식했다. 이곤은 늦을세라 상무님을 향해 반 샷 안 돼요. 반 샷 안 돼요, 를 외쳤고. 상무님은 웃음을 감추려고 마시던 소주를 자기도 모르게 뿜었다. 이곤의 개그가 모두에게 통하는 건 아니었지만, 아주 간혹 취향인 사람이 있었다. 여직원 중 까칠하기로 악명 높았던 나현은 이곤이 건배사를 마치고 자리에 앉을 때까지 이곤을 벌레 보듯 쳐다보았다. 이곤은 그 시선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몇 달 후 신입 사원 입사 기념 회식이 있었고, 그때 나현이 건배사 제의를 받았다. 나현은 미소를 지으며 잔을 들고 벌떡 일어나 신입 사원들을 내려다보았다. 자, 제가 청바지로 건배사를 하겠습니다. 운을 띄워 주세요. 그러자 신입 사원들이 외쳤다.
청! 청춘은. 바! 바로. 지! 지금. 청바지!
직원들이 건배사에 환호하며 술을 마실 때 이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게 무슨 건배사야. 삼행시지. 삼행시랑 건배사도 구분을 못 해? 저러니 애들이 뒤에서 욕하는 줄도 모르지. 그리고 우리가 패션 회사도 아니고 청바지가 뭐야? 차라리 할 거면 편의점으로 하든가. 편! 편리한 세상을 위해. 의! 의로운 세상을 위해. 점! ……점은 뭐로 하지? 일반 사람들이라면 점점 더 발전하는 세상을 위하여! 라고 하겠지만, 그건 유머 아마추어들이나 하는 짓이지. 여기서 허를 찔러야 해. 점……? 점례야, 기다려라. 오빠가 간다! 그렇지. 이 정도는 되어야 유머라고 할 수 있지. 오빠가 간다! 를 하고 나서 사람들이 박장대소를 터뜨릴 때 곧바로, 간다. 간다. 뿅 간다! 까지 넣어 주면 화룡점정이겠네. 이야. 기가 막혀. 다음에 써먹어야지. 이곤은 그런 생각을 한 뒤 미소를 지으며 처음처럼을 마셨다. 나현은 그 모습을 보고 이곤이 자신의 건배사 센스에 미소를 지었다고 착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