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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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5
한국말로 빽 소리쳤지만 넬리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데는 충분했다. 넬리는 재헌을 잠시 바라보더니 그에게 쪽지를 한 장 건넸다. 영수증이었다. 지난달 밀린 급여와 약값까지, 상당액이 적혀 있었다.
“그동안 사모님을 봐서 참았던 거예요. 여기서 겪은 끔찍한 일 때문에. 하지만 더는 곤란해요. 못 할 짓이라고요! 이번 주까지 부탁드려요.”
넬리는 차갑게 재헌을 지나쳐 현관으로 향했다.
“넬리. 미안해요. 오늘 내가 좀…… 힘들었어요.”
재헌이 이마를 감싸 쥐며 말했다.
“사모님만 할까요.”
넬리가 떠나고 나서야 안방에서 삑삑 소리가 들렸다. 재헌은 조심스레 문을 열고, 병실을 옮겨 온 듯한 방에 들어섰다.
삑…… 삑…….
심전도 모니터가 규칙적인 소리를 냈다. 침대 위에는 각종 의료 장비에 연결된 여자가 누워 있었다. 삭발한 그녀의 머리는 누군가가 힘주어 누른 것처럼 움푹 들어가 있었다.
재헌은 수입의 대부분을 아내의 의료비로 쓰고 있었다. 게다가 최근 갑작스러운 발작으로 응급 처치에 꽤 많은 돈을 써야 했다. 다행히 넬리의 배려로 파산은 면할 수 있었다. 방금 전까진.
가은은 미동도 없이 그저 치켜뜬 눈으로 재헌을 맞았다. 벌어진 입가에서 묽은 침이 흘러내렸다. 재헌은 손수건을 꺼내 입술을 닦았다. 뇌의 절반을 잃었어도 재헌에게 가은은 여전히 소중한 아내였다. 가은도 분명 같은 생각일 거라고, 재헌은 억지로라도 그렇게 믿었다. 그것이 재헌을 지탱하고 있는 유일한 믿음이었다. 그는 그런 방식으로 오래된 잘못을 속죄 중이었다. 그러나 모든 믿음이 그러하듯, 가은은 오늘도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 침묵 속에서 들려오는 건, 아버지의 부름뿐이었다. 생가에 대한 제안이 자꾸만 생각났다. 재헌은 흘러내린 이불을 가은에게 잘 덮어 주고 밖으로 나왔다.
재헌은 서재로 들어와 책상 서랍의 맨 아래 칸을 열었다. 묵직한 베레타 92 권총이 보였다. 오래전 본(Bonn)의 한 차이나타운까지 한참 차를 몰고 가 구매했던 총이었다. 호신용으로 장만했지만, 다행히도 여태 쏠 일은 없었다. 그때도 이미 고물이었는데, 오랜만에 다시 보니 발사나 될까 싶었다.
재헌은 총을 치우고, 그 아래 깔려 있던 낡은 수첩을 꺼냈다. 거의 30년 만에 펼쳐진 수첩은 누렇게 변색되어 독특한 향을 풍겼다. 어쩌면 30년 만에 고국의 나무 냄새를 맡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 수많은 나무를 하나하나 만져 보고 깎아 보며 터득했던 것들이 수첩에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부지런히 그려 대며 나의 것으로 만들려 했던 ‘집’이 그곳에 있었다. 거친 선으로 휘갈겨진 도면들이었다. 재헌은 사이에 끼어 있던 종이 뭉치를 탁자 위에 펼쳐 보았다.
넉 장의 종이를 위아래로 배치하자 그 집의 도면이 드러났다. 요 며칠간 한인 커뮤니티에서도 떠드는 통에 지겹도록 보았던 그 집이었다.
집터 중심엔 안채와 사랑채가, 남는 곳엔 우물과 사당이 균형감 있게 자리 잡고 있었다. 기와와 기둥의 개수, 그 사이사이의 간격, 보의 종류는 무엇이고 장부(한옥 건축에서 각 재료의 연결하는 방식)는 무엇인지, 또 그 결구 방식까지. 곳곳에 작은 주석들이 빼곡하고도 세밀하게 쓰여 있었다. 도면 한쪽에는 잉크가 번진 글씨가 남겨져 있었다.
이운암 생가터. 1974.
아버지와 절연한 후로 다시 볼 일 없던 집이었다. 하지만 이 망할 집이 또 그를 마주하게 만들었다. 필연이든 우연이든 어쩌면 이번이 그 연을 끊어 버릴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재헌은 생각했다.
“헤이 시리.”
“네.”
책상 위 아이패드가 독일어로 답했다.
“연락처 좀 열어 줘.”
재헌은 저장해 둔 번호로 연락했다. 통화 연결음이 한참을 이어졌다. 지금까지 도망쳐 온 긴긴 세월만큼.
그러다 덜커덕, 그 도피에 끝을 고하듯 운명이 전화를 받았다.
*
“전화 받았습니다…….”
현주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상대는 수화기 너머에 있는데도 두 손으로 공손히 핸드폰을 잡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족쇄에 묶여 있는 것 같았다.
“네, 아직이요. 그럼 앞으로 전 어떻게 되나요…… ? 네…… 네…….”
현주가 상대의 말을 들으며 상 위에 차려 놓은 음식들을 보았다. 닭백숙, 잡채, 빈대떡, 육개장. 모두 시록이 좋아하는 음식들이었다.
오랜만에 집에 온다는 시록을 위해 차려 놓았지만, 운송이 추가돼 늦는다고 연락이 왔다. 식어 빠진 음식들에선 시큼한 냄새가 올라오고 있었다.
그때 창밖에서 비춰 오는 강한 불빛에 식탁 위 초파리들이 흩어졌다. 현주는 창 너머로 시록의 흰색 트럭을 확인했다.
“지, 지금 막 도착한 것 같아요! 그래도 괜찮을까요……?”
덜커덕.
현주는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다 통화가 종료된 핸드폰 화면을 보았다. 발신자는 ‘시록아빠’였다.
시록은 운전석 벽면에 또 한 번 청 테이프를 덧댔다. 파이프가 뚫고 나온 곳을 골판지와 테이프로 발라 놨지만, 아침부터 못 견디고 떨어지더니 오는 내내 덜렁거렸다.
사고 직후 회사에 연락해 수리와 보험 처리에 대해 얘기했다. 그러나 수리하는 동안은 뚜벅이 신세니, 그전에 엄마부터 만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이틀 전 통화에서 불안하게 떨리던 엄마의 목소리가 걱정되기도 했다.
시록은 구멍을 대충 막고 내려서 숲속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복잡했던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엄마의 집은 산 중턱에 있는 통나무 산장이었다. 이 곧게 솟은 나무들 사이에서 시록은 자연히 자연의 냄새를 접해 왔다. 그래선지 시록은 지금도 틈틈이 풀 내음을 맡는 것으로 답답한 트럭 생활을 해소하고 있었다. 시록은 나무만큼이나 포근한 엄마를 찾아 산장으로 총총 달려갔다.
하지만 산장 안은 시록의 예상과 달리 한기로 가득했다. 온 집 안이 깜깜했고,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20년 넘게 살아온 집이 마치 남의 집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시록은 긴장감을 없애려 괜히 더 크게 엄마를 불렀다.
“엄마, 나 왔어! 아니, 갑자기 운송을 맘대로 더 잡는 바람에…… 쏘리!”
차마 엄마에게 귀신을 보고 사고를 냈다 할 순 없었다. 이미 그 문제로 충분히 엄마 속을 썩였던 시록이었다. 현주는 모든 것이 호르몬의 문제라며 현대 의학에 기대는 쪽이었다. 그 덕에 시록은 유금 스님을 만나기 전까지 지겨운 심리 치료와 약물 복용의 시기를 거쳤다. 그래도 뭐든 해 보려는 진심을 알았기에 딱히 엄마를 원망하진 않았다. 다만 이해를 바라지도 않았기에 서둘러 둥지를 떠난 것이었다. 그렇게 적당한 거리감이 생기고 나서야, 시록은 엄마가 더 편해졌다.
“엄마? 엄마 자?”
시록은 엄마를 부르며 집 안 구석구석을 둘러보다가 이내 현주를 맞닥뜨렸다. 숨바꼭질에서 들킨 술래처럼 현주는 부엌 식탁에서 조마조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썩어 가는 음식들과 기이한 엄마의 모습에 시록은 얼어붙었다. 순간 그것이 엄마인지 또 다른 귀신인지 의심스러웠다.
“엄마……?”
시록은 조심스레 한 발짝 다가갔다. 현주는 쉬지 않고 입을 움직이고 있었다. 입술을 작게 모은 채 무언가를 재잘대고 있었다.
“거룩하신천룡님당신께모든걸드립니다천개의손으로절굽어살펴주세요거룩하신천룡님당신께모든걸드립니다천개의손으로절굽어살펴주세요.”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현주는 같은 문장을 쉬지 않고 반복했다.
시록은 소름이 끼쳐 왔다. 그간 꾸었던 악몽의 몇 배나 되는 불쾌감이었다. 깨어나면 사라질 찰나의 것이 아닌, 영원히 그를 옭아맬 현실이었다.
현주는 식탁에 세워 둔 장식용 십자고상으로 천천히 손을 뻗었다. 15센티미터 길이의 황동 재질 십자가로, 시록이 치료받으면서 들여놓은 것이었다.
“어, 엄마…… 왜 그래?”
시록은 다시 한번 엄마를 불렀다 거룩하신천룡님당신께 모든걸드립니다.
눈앞에 있는 것이 엄마가 아닐 수도 있다는 무의식을 애써 외면했다 천개의손으로절굽어살펴주세요.
현주는 서서히 십자고상의 아랫부분을 입으로 가져갔다 거룩하신천룡님당신께모든걸드립니다.
현주의 부릅뜬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천개의손으로절굽어살펴주세요.
“다만 제 집은 누추하니…… 문을 두드리지 말아 주세요…….”
현주는 거꾸로 쥔 십자가를 입에 꽉 물었다. 마치 누군가가 억지로 조종하듯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엄마!”
쾅! 현주가 식탁으로 머리를 세차게 들이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