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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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
2화. 개기(開基) —집터를 닦음
도끼질 소리에 시록이 눈을 떴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도끼가 자신을 내려치는 꿈이었다. 하지만 시록은 덤덤했다. 어릴 적 자주 꾸던 악몽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입이 찢어져 웃는지 우는지 모를 여자나, 온몸이 물에 불어 살가죽이 녹아내리던 여자, 도살된 닭처럼 목 없이 비틀거리던 여자의 꿈. 한 스님의 조언에 따라 역마살을 사주에 붙이자 한동안은 잠잠했던 꿈이었다.
오랜만에 본 뒤숭숭한 꿈자리에 시록은 트럭 차창을 내려 찬 공기로 머릿속을 씻었다. 산길 졸음쉼터에서 내려다보이는 파란 강물엔 누런 여명이 번져 가고 있었다.
시록은 한 점 남은 졸음을 완전히 떨치려 루틴을 시작했다.
트럭 운전석 뒤에 마련된 한 평 조금 넘는 공간. 5년 가까이 몸을 누였어도 여전히 답답한 그곳에서 시록은 침대 서랍 속 양말을 꺼냈다. 몰티즈처럼 생긴 강아지 캐릭터가 그려진 흰색 수면양말이었다. 매일 보는 게 회색 아스팔트와 거무튀튀한 아저씨들뿐이라 귀여운 양말을 모으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이어서 전날 휴게소에서 사 둔 크림빵과 보리차 한 페트로 배를 채웠다. 시록은 입에 남은 단맛이 아려 오기 전에 민트맛 가글로 입을 헹궜다. 차 밖으로 나와 가글을 퉤 뱉고는 퍼석한 금발 머리를 뒤로 묶었다. 싸구려 염색약으로 물들였던 지푸라기색 머리는 이제 뿌리도 꽤 자라 정수리가 검었다.
이로써 출발 전 루틴은 모두 완료다. 스물일곱의 여성 트럭 기사 문시록을 버티게 한 습관이었다. 마치 그가 모는 트럭처럼. 단순하지만 효율적으로.
시록은 다시 흰색 트럭에 올랐다. 열여덟 살 처음 대형 면허를 따고 중고차 매장에서 찾은 일본 브랜드의 8톤 트럭이었다. 크기에 비해 아기자기한 디자인이 괜찮았고, 가격도 나쁘지 않아서 한눈에 들었었다. 몇 년 뒤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 다시 찾아갔을 때도 팔리지 않았기에 할부로 구입한 차였다. 이젠 그마저도 다 갚았고 첫 해 몰았을 때만큼 설렘은 없지만, 아직은 녀석과 좀 더 지내고 싶었다. 얼핏 보기에 평범한 여대생 같은 시록과 거대한 트럭의 조화는 생경해 보였다. 하지만 시록과 친한 트럭커들은 ‘저랑 똑닮은 차를 잘도 골랐다’고 얘기하곤 했다.
시록이 시동을 걸자 엔진이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이어서 기어를 넣자 쇠파이프를 잔뜩 실은 짐칸이 흔들렸다. 파이프끼리 부딪치며 나는 깡깡 소리에 새들이 날아갔다. 그렇게 새벽의 적막을 깬 트럭이 묵직하게 출발했다.
시록은 산길을 따라 올라갔다. 한 시간쯤 내달리자 배달지인 ‘정정사’ 입구가 보였다. 어릴 적 꾸던 악몽을 떨쳐 보려 종종 찾았던 절이었다. 이렇게 고객으로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지만, 늘 절에서 강조했던 게 인연이었다.
오, 부처님 대박.
시록은 재미난 우연이라 생각하며 요 며칠간 정정사를 오갔다.
입구에 다다르자 한 스님이 경광봉을 들고 시록의 트럭을 세웠다. 법복 위에 야광 조끼를 입은 모습이 영 안 어울렸지만, 시록은 뭐든 사람을 쓰느니 본인이 직접 하는 이곳의 주지, 유금 스님임을 알아보고 차에서 내렸다.
“뭐야, 시록이냐?”
유금 스님은 시록을 보고 놀라는 눈치였다. 이 큰 트럭을 매일같이 봤으면서도 자신인 줄 몰랐다는 생각에 시록은 조금 섭섭했다.
“유금 스님! 뭔 일 있어요?”
“연락 못 받았어? 오늘 오지 말랬는데. 너희 회사에다.”
데이터가 끊겼나?
시록은 의아해하며 내비게이션으로 거치했던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전화며 메시지며 회사에서 온 연락은 없었다. 애초에 데이터가 끊겼다면 내비도 먹통이었어야 했다. 당장 원인은 모르겠지만 시록은 하루치 운행을 날린다는 생각에 짜증이 났다.
보름 전부터 정정사 석탑 공사에 동원되는 자재를 운반 중이었다. 오래전 한 관광객이 주차 중에 실수로 들이받아 금이 갔던 석탑이었다. 그런데도 유금 스님이 적당히 실리콘으로 마감한 바람에 시간이 갈수록 틈이 점점 벌어진 것이었다.
“다음 주까진 석탑 공사 안 해. 상중이야.”
유금 스님이 경광봉을 흔들며 말했다.
“누구?”
“지범근 거사님. 도편수.”
“도편수?”
처음 들어 보는 단어에 시록이 되물었다.
“한옥 짓는 목수를 대목이라 하거든? 그 대목장들 중에 서도 제일 이거.”
유금 스님은 엄지손가락을 들었다. 10여 년 전 정정사의 보수 공사에 참여했던 지범근은 시주라며 보수를 꽤나 깎아 주었다.
“하…… 그럼 뭐, 육개장 좀 안 줘요? 헛걸음한 것도 속 쓰린데.”
시록 나름의 응석이었다. 유금 스님한테는 그래도 될 것만 같은, 세상에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먹다 얹히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이운암 생가도 지으신 분이야. 기자니 의원이니 도착하면 정신없을 텐데, 괜찮겠어?”
역시나 유금 스님은 시록의 응석을 받아 주었다. 재치 있으면서도 다정하게 사정을 설명했다. 시록은 라디오에서 얼핏 들었던 이운암 생가의 화재 소식을 떠올렸다.
“아, 어제 불난 거기요……? 아니, 이운암이 누구길래 다들 난리예요?”
유금 스님은 혀를 찼다. 세간의 평은 갈려도 국사책 한 번만 들여다봤으면 알 수 있는 게 이운암이었다.
“내 이러니까 최소한 고등학교는 나오라 그랬잖아.”
무병으로 괴로워하던 시록에게 역마살을 붙이라고 조언한 게 그였다. 하지만 그달로 학교도 관두고 트럭을 몰 거라 곤 상상도 못 했었다. 괜히 타고난 행동력에 역마살까지 달았나 싶어 후회도 했었다.
“그랬다간 진작 엄마랑 굶어 죽었죠. 알았어요, 오늘 그냥 갈게요.”
시록이 아쉬운 듯 합장하며 인사했다. 유금 스님도 경광봉을 겨드랑이에 끼우고 합장했다. “그래. 운전 조심하고.”
시록이 다시 트럭에 오르려는데 유금 스님이 넌지시 물었다.
“요즘은 좀 평안하냐?”
아침에 꾼 꿈이 떠올랐지만, 남한테 걱정 끼치는 게 늘 맘이 불편한 시록이었다. 그럴 때마다 썼던 얼굴, 가벼운 미소로 얼버무리는 작전으로 유금 스님을 안심시켰다. 단순하지만 효율적이었다.
“네, 뭐. 그럭저럭.”
시록은 평소보다도 트럭을 살살 몰며 하산했다. 이왕 하루 운행을 공친 김에 산길 초입에서 닭칼국수나 먹고 갈 심산이었다. 얼마 전 연예인이 하는 유튜브에 소개된 이후로 정정사 맛집이라며 점심시간에 늘 사람이 붐볐다. 이 속도라면 오픈 시간에 딱 맞춰 도착할 테니 오랜만에 편히 밥을 먹겠다 싶었다.
맞은편에서 반대 차선으로 검은 관용차들이 줄지어 다가왔다. 반짝반짝 관리가 잘된 차체를 본 시록은 유금 스님이 말한 의원들이란 걸 직감했다.
안 그래도 좁고 굽은 길을 비싼 차들이 줄줄이 지나는 게 아니꼬웠다. 관용차 무리와 가까워지자 시록은 괜히 긴장하며 트럭을 최대한 가드레일 쪽에 붙였다. 관용차들이 트럭 옆을 지나갔다. 시록은 흘긋 그쪽을 봤지만 하나같이 진한 선팅에 자기 얼굴만 비쳐 보였다. 그런데 찰나의 순간, 시록은 얼핏 다른 얼굴을 보았다.
세 번째 관용차였다. 뒷좌석 차창이 내려가 있었고 안에 타고 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아무 기력도 없이 텅 비어 있는 눈. 얼굴에 검버섯과 주름이 가득했고, 몸은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든 초로의 노인이었다.
스산한 기운이 시록의 뒷덜미를 훑었다. 꿈에서 도끼가 내려쳤을 때 느꼈던 감각과 비슷했다. 다행인 건지 노인의 얼굴은 순식간에 지나갔고, 이미 관용차 무리는 백미러에서 멀어져 갔다. 시록은 찜찜한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정면을 보았다.
도로 한복판에 피 칠갑한 나체의 여자가 서 있었다. 온몸이 찢기고 난자당한 몰골로 시록을 향해 입을 쩍 벌렸다.
시록은 핸들을 부여잡고 황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시록과 함께 타이어가 비명을 지르며 미끄러졌다. 차창 밖의 풍경이 핑 돌다가 사납게 내려앉았다.
적재된 파이프가 쇳소리를 울리더니, 관성에 못 버티고 운전석으로 날아들었다.
소름 끼치는 소리가 한동안 고막을 긁어 댔다. 시록은 얼굴 옆 헤드레스트를 꿰뚫고 나와 있는 파이프를 한참 보았다. 몇 센티만 가까웠어도 머리통이 날아갔을 것이었다. 시록의 손이 엔진과 함께 덜덜 떨리고 있었다. 차마 눈을 뜰 수 없었다. 한동안 안 보이던 그 존재들이 다시 돌아왔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시록은 여자가 사라졌길 빌며 천천히 앞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