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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로그

문학의 모든 빛깔이 담긴 기록의 저장소

북다로그는 교보문고의 출판 브랜드 ‘북다’가 운영하는 연재 플랫폼입니다.
‘문학’을 중심으로 기록될 수 있는 다양한 글을 가장 먼저 만나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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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월일

1화. 1화.한국어판 서문

신이 오신다면, 어두운 밤 영혼의 빛은 양지를 향한 색깔일 것이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 있어서 글쓰기를 회상하는 글쓰기보다 더 따스하면서도 서글픈 일은 없을 것이다. 늙어 쇠약한 노인이 젊은 시절의 어느 날을 회상하는 것과 같은 일이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인 1996년, 나는 이미 5년째 허리를 곧게 펴고 걷지 못하고 있는 처지였다. 그렇다고 진짜 곱사등이처럼 등이 굽고 허리가 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나를 절반의 기형과 절반의 폐인 상태로 몰아넣은 그놈의 허리 질환 때문에 영원히 머리가 어지러웠고 이명과 심한 목 디스크를 동시에 앓고 있는 정도였다. 그리하여 나는 1년 내내 유명한 의사들을 만나보고 명약을 구하기 위해 중국 북방의 여러 성을 돌아다녔다. 그러면서도 매일 어두운 곳에서 홀로 눈물을 흘리며 슬픔 속에서도 끊임없이 침대에 엎드려 글쓰기에 몰두했다. 글쓰기를 통해 생명의 의미를 따져 묻고 생명의 무의미를 떨쳐버리려 했다. 그러다가 그해 가을, 신을 만난 것처럼, 우연의 도움으로 중국 고대 도시인 시안(西安) 교외에 사는 민간에 이름난 명의를 한 분 만나게 되었다. 놀랍게도 그 덕분에 내 허리와 목 질환이 눈에 띄게 완화되었고, 몸도 한결 편안해졌다. 그리하여 그해 가을 끝자락의 어느 날, 나는 시안 근교의 옥수수밭 사이로 펼쳐진 작은 길을 따라 계속 앞을 향해 걷고 있었다. 그렇게 인적이 없이 황량하기만 한 곳을 향해 뭐라고 단정할 수 없는 기묘한 명상 속에서 길을 걷고 있었다. 사람이 몸을 곧게 펴고 걷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즐거운 일인지를 온몸으로 실감했다. 신의 손길이 나를 어루만져주는 것 같았다. 생명의 진정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저 앞에서 해가 지고 있었다. 들풀이 내 발밑에 깔려 있었다. 고요함 때문인지 주변에서 옥수수가 사각사각 숨을 쉬거나 움직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처럼 적막함과 황량함 속을 걷다가 왠지 모르지만 갑자기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이어서 깊은 죽음 같은 적막의 순간에 머릿속에 맹렬한 깨달음이 밀려왔다. 머리가 아주 맑아지고 깨끗해지는 느낌이었다. 한 가지 생각이 번개 같은 찰나에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인류의 종말이 다가와 이 세상에 사람 하나와 씨앗 한 알만 남게 된다면 그다음은 어떻게 될까?’ 내가 온몸을 떨면서 갑자기 걸음을 멈춘 것은 이 벼락같은 생각 때문이었다. 극심한 놀라움과 당혹감에 온몸이 거세게 흔들렸다. 바로 그 순간, 나는 황혼의 햇빛 속에서 옥수수밭 끝이 해를 향해 환하게 밝아지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 빛은 춤을 추듯이 움직이면서 세상 전체를 달콤함에 빠지게 했다. 세상이 빨간 비단과 파란 비단 속에서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이때부터 나는 시인 엘리엇이 말한 ‘영혼의 시각’을 믿기 시작했다. 신의 은총을 본 것 같았다. 아주 미세한 번개들이 내 눈앞을 번쩍번쩍 지나가며 작은 그림자들을 남겼다. 나는 황망히 몸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정적에서 벗어나 사림들이 바글거리는 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갑자기 내가 더 이상 장애인도 아니고 기형의 인간도 아닌, 누구보다 건강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그 누추한 여관으로 돌아온 나는 얼른 짐을 꾸린 다음 나의 은인인 민간의 명의를 찾아가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와 악수하고 돌아와 다음 날 날이 밝기 무섭게 서둘러 시안역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하루 꼬박 기차를 타고 베이징의 집으로 돌아왔다. 아침 일찍 일어나다 보니 먹은 게 거의 없었는데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나는 곧장 중국의 장애인용품 공장에 특별히 주문하여 제작한 글쓰기 전용 의자에 엎드려 글을 쓰기 시작했다. 얼굴은 하늘을 향하고 두 팔을 들어 올린 채 머리 위 허공에 옆으로 걸린 선반과 연결된 판에 대고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그 작품이 바로 『연월일(年月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