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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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프타운
5화. 5
이렇게 대놓고 신분증과 지문을 요구해도 되는 거야?
안으로 들어오고 나서야 뒤늦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진입로를 따라 걸어가는 동안 찝찝하고 불쾌한 느낌은 사라져버렸다. 이따금 바깥 도로로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와 새소리를 빼면 조용한 곳이었다. 은은하게 풍겨오는 상큼한 풀 냄새도 마음을 가라앉혀 주었다.
이끼와 덩굴 식물로 장식된 돌벽을 지나자, 눈앞이 탁 트이면서 조그만 공원처럼 생긴 부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널찍한 도로를 사이에 두고 왼쪽에 세 채, 오른쪽에 두 채의 조그만 집이 간격을 두고 늘어서 있었다. 모두 개별 차고가 포함된 깔끔하고 아담한 복층 콘크리트 건물로, 흰색 외벽에 뚜렷이 대비되는 까만 창문이 나 있었다. 집 앞에는 저마다 조그만 화단까지 딸려 있어서, 거인이 줄을 맞춰 툭 떨어뜨려 둔 장난감처럼 보였다. 뒤쪽으로 텅 빈 집터가 이어지는 걸 보면 아마 추가로 몇 채 더 지을 예정인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이 다섯 채가 전부인 듯했다. 바깥에서 그 요란을 떤 것치고는 너무 아담한 곳이라 좀 어이가 없었다.
그래도 규모야 어쨌든 이곳은 ‘세이프 타운’이라는 이름답게 정말 번화가를 벗어난 변두리의 ‘타운하우스’ 같다. 도시와 전원생활을 모두 누리고 싶은 현대인들, 아이와 반려동물, 차와 돈을 모두 가진 젊은 부부, 아무 문제 없이 착실하게 자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집. 하지만 지수 자신을 위한 곳은 아닌 것 같다. 도대체 그 여자는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집을 권한 거지?
“여기예요!”
옆을 돌아보니 그제야 화단과 돌벽이 서 있는 광장 왼쪽 저편으로 조그만 건물이 보였다. 윤미주가 그 앞에 서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요란한 파란색 캐시미어 니트 차림의 거대한 덩치가 짙은색 사암 건물을 배경으로 확 두드러졌다.
“미안! 당황했죠? 미리 말해놨는데, 우리 보안팀이 시간에 워낙 민감해서.”
“늦어서 죄송해요. 조금 헤매느라……. 버스 정류장에서 이렇게 한참 걸어야 하는 줄은 몰랐어요.”
“에이, 익숙해지면 별거 아니야. 나도 차 없는데 다닐 만해요. 운동도 되고 좋지. 대로변이라 별로 으슥하지도 않고.”
윤미주가 야단스럽게 손을 흔들었다.
“저녁 10시 넘어서 필요할 때 연락하면 우리 보안팀이 가끔 버스 정류장까지 차로 마중도 나오거든요. 하지만 11시가 넘으면 좀 곤란하지. 문제가 커지니까.”
응? 그게 무슨…….
하지만 이유를 물어볼 새도 없이 등을 떠밀려서 안으로 들어갔다.
“짜잔! 여기가 우리 커뮤니티 센터. 내가 원래는 여기서 요가를 했어요. 지금은 지하 헬스룸이 공사 중이라 잠깐 학원에 다닌 건데, 그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만났으니 잘된 거지.”
문이 열리는 순간, 지수는 하려던 말을 잊고 말았다. 환하게 내리쬐는 햇빛, 진한 커피 향, 은은한 음악까지. 한가한 평일 오후, 근사한 카페에 들어온 느낌이다. 건물 안은 탁 트여서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넓어 보였다. 오른쪽 벽면을 꽉 채운 책장에는 책이 가득 꽂혀 있었다. 책장 앞에 바처럼 놓인 기다란 아일랜드 탁자의 콘크리트 상판 위에는 커피머신과 종이컵, 간단한 간식과 냅킨, 해골 모양의 석재 문진 같은 세련된 장식이 놓여 있었다. 얼기설기 철골이 드러난 높다란 천장에서 길게 드리워진 조명은 짙은 녹색이었고, 한가운데 놓인 두 개의 길쭉한 가죽 소파는 짙은 밤색이었다.
그중 하나에 몸집이 작고 날씬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턱선에 맞춰 반듯하게 자른 새까만 단발머리, 가는 은테 안경, 깃이 조금 열린 하얀 셔츠에 까만 바지, 멋스러운 로퍼까지, 빈틈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끝이 살짝 올라간 눈매, 뾰족한 턱, 유난히 얇은 입술은 야무지게 꽉 닫혀 있었다. 문득 좀 더 차려입고 올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풀이 인 노란색 카디건 대신 재킷이라도 걸치든가, 푸석한 머리라도 깔끔하게 묶고 올걸.
무릎 위에 올려둔 서류를 보고 있던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갑자기 명치 끝이 콕콕 찌르는 듯 아파왔다. 그제야 주머니 속에 넣어둔 약 생각이 났다. 들어오기 전에 얼른 삼키고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했는데, 밖에서 쓸데없는 실랑이를 벌이는 바람에 잊어버린 것이다. 큰일 났네. 벌써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것 같다. 이제 곧 손이 떨리고 목이 타겠지. 그러면 보나 마나…….
그때 여자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 여유 있는 미소였다. 여자가 웃으며 손짓하자, 지수의 입에서 막힌 숨이 흘러나왔다. 콕콕 찌르던 뱃속이 천천히 풀어지며 숨쉬기가 한결 편해졌다.
“서지수 씨?”
카랑카랑한 목소리만큼이나 똑 부러지는 말투였다.
“하주연이에요, 세이프 타운의 입주자 대표.”
지수는 얼결에 허리를 굽혔다가 얼른 정신을 차리고 여자가 내민 손을 잡았다. 손이 땀으로 축축해서 조금 민망했다.
“미주 씨, 우리 차 좀.”
“네, 네!”
윤미주가 어쩐지 비굴한 태도로 호들갑을 떨며 바 쪽으로 달려가는 사이, 지수는 여자가 가리키는 대로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걸치는 순간, 가죽 소파가 삑삑거리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찾기 어렵진 않으셨어요? 대로변에 있지만 헷갈리기 쉬운 곳이라.”
“네, 조금…….”
“그래도 살아보면 이런 데가 좋아요. 딱 아는 사람들만 아는 타운. 우리끼리 조용하고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곳. 여자 혼자 살기에는 이만한 데가 없죠.”
모델하우스의 홍보문구처럼 느껴지는 대사였다.
“네, 그렇겠네요.”
지수는 대충 장단을 맞춰주며 미소 지었다.
“그런데…….”
“네?”
여자가 안경 너머로 지수를 쳐다보았다. 눈을 한 번도 깜빡이지 않는 것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집은 다섯 채뿐인가요? 아니면 다른 곳에…….”
“아, 이것뿐이에요.”
여자가 딱 잘라 말하더니 곧바로 덧붙였다.
“지금은.”
그리고 설명을 시작했다.
“운영 모델을 시험하는 중이라서요. 일종의 시범 타운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뒤쪽 부지에 추가로 더 지을 예정이지만, 아마 가구 수를 많이 늘리진 않을 거예요. 잘된 일이죠. 소수의 선택받은 사람들만 있는 게 좋잖아요. 인원이 많아지면 괜히 분란만 일어나지.”
“그렇기도 하겠네요.”
고개를 끄덕이는데 윤미주가 찻잔과 찻주전자, 쿠키가 담긴 작은 접시를 가져왔다. 카페 안에 진한 커피 향이 가득한데 굳이 차를 대접하는 게 특이하게 느껴졌다.
“제가 카페인에 좀 약해서 오후엔 커피를 안 마시거든요.”
이쪽의 생각을 눈치챈 듯 하주연이 말했다.
“그래서 즐겨 마시는 차로 준비해 봤는데, 입에 맞으시면 좋겠네요.”
“괜찮아요. 저도 차 좋아해요.”
찻잔에서는 기묘하게 달큼한 풀 냄새가 났다. 낯선 향기였지만 여기까지 줄곧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걸어온 데다 잔뜩 긴장한 탓에 목이 말랐다. 먹기 좋을 만큼 적당히 따뜻한 차를 벌컥벌컥 들이켜자 금세 바닥이 보였다. 여자가 미소 지으며 조금 더 따라주었다. 몸이 노곤하게 풀어지니 그제야 지수도 마주 웃어줄 여유가 생겼다.
“긴장하실 거 없어요. 말이 면접이지, 집 구경도 하실 겸, 편하게 얘기나 하자고 모신 거니까.”
하주연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래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사인부터 하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