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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로그

문학의 모든 빛깔이 담긴 기록의 저장소

북다로그는 교보문고의 출판 브랜드 ‘북다’가 운영하는 연재 플랫폼입니다.
‘문학’을 중심으로 기록될 수 있는 다양한 글을 가장 먼저 만나볼 수 있습니다.
매주 소설과 에세이 등 새로운 이야기가 게재됩니다.

세이프타운

2화. 2

“내가 이 덩치에 요가를 엄청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나 못지않으신가 봐. 아침반 저녁반 가리지 않고 두루두루 마주쳤던 것 같은데.” 놀란 가슴을 카페인으로 진정시켜 줘야 한다는 여자를 따라 얼결에 근처 카페에 마주 앉게 됐다. 혼잡한 카페 안에서 무거운 탁자를 혼자 번쩍 들어 구석으로 옮기는 괴력이 어쩐지 든든했다. “그렇게 꼬박꼬박 나오긴 쉽지 않은데. 집이 이 근처예요?” “아, 그건 아니에요. 음, 잠깐 …… 거기서 지내는 중이라.” 뱉어놓고 바로 후회가 됐다. 그냥 적당히 둘러댈걸. 하지만 이런 대화가 너무 오랜만이라 당황해 버렸다. 경찰이나 의료진, 상담사가 아니라 그저 평범한 사람과 나누는 평범한 대화 말이다. “응? 거기서 지낸다고요? 퓨어요가에서? 그러니까, 잠을 잔다고?” “아, 양 원장이 제 친구예요.” “어머! 학원을 같이 운영하시는구나.” “아니에요.” 지수는 손을 내저었다. “그냥, 제가 이사하려다가 일이 좀 잘못돼서……. 계약 기간이 한참 남았는데 방을 급히 빼려니까, 집주인이 보증금을 못 주겠다며 버티더라고요. 그래서 잠깐 신세 지는 거예요.” “저런! 그럼 이사 갈 집은 어쩌고? 그냥 날린 거예요?” “음, 그게 아니라 …….” 애초에 갈 곳이 없었어요. 그냥 그 집에서 하루빨리 도망치고 싶었을 뿐. “야, 이년 잡아! 잡으라고오오!” “와, 힘 겁나 센데? 가만 좀 있어봐, 아줌마! 죽기 싫으면!” “씨발! 가만히 좀 있으라고!” “옷이라도 벗겨버릴까, 오빠? 튀어 나가서 어디 신고라도 하면 어떡해!” “그게 좋겠다. 벗겨! 벗겨! 그리고 신고 못 하게 아예 찍어버려어어!” 대답할 말을 찾는 동안 커피잔을 쥔 손가락이 덜덜 떨렸다. 1000, 999, 998, 997…… 눈앞이 부옇게 흐려지기 시작하는데, 갑자기 여자가 벌떡 일어섰다. “죽을 고비를 넘겨서 그런가, 달달한 게 당기네! 케이크 어때요? 내가 가서 하나 골라 올게.” 커다랗고 우악스러운 목소리가 어쩐지 고마워서 억지로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지옥에 다녀온 뒤로 눈물 따위는 싹 말라버렸으니까. “도둑이 들었었거든요.” “어머, 설마…… 집에 있을 때?” 지수가 말없이 쓴웃음을 짓자, 여자가 “진짜?” 하고 소리치다가 얼른 주위를 돌아보고 목소리를 낮췄다. “아니, 어쩌다가? 거기가 몇 층인데요? 벽이라도 타고 들어왔나?” “그건 아니고…… 제가 문을 열어줬어요, 뭘 좀 착각해서.” 착각한 건 없었다. 제대로 찾아온 사람들인 줄 알았을 뿐. 머리를 하나로 높이 묶은 여자애는 무척 어려 보였고, 새빨간 립스틱을 바른 입으로 껌을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짧은 청치마 아래로 쭉 뻗은 다리가 싱그럽고 예뻤다. “소파…… 보러 왔는데요?” 그런 것에 관심이 있을 것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어쨌든 안심하고 문을 활짝 열어줬다. 옆에 있던 남자애가 눈에 들어온 것은 그다음이었다. “혼자는 못 들고 갈 것 같아서 남자 친구랑 같이 왔어요.” “아, 내가 같이 내려줘도 되는데. 2인용이라 엘리베이터에도 거뜬히 들어가거든요.” 둘은 대답도 없이 신발을 벗고 곧장 안으로 들어왔다. 그때 현관문을 활짝 열어둬야 했는데. 그런 생각을 그 후로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틈만 나면, 정신을 조금만 놓으면, 지수의 기억은 늘 그때로 돌아간다. 그 기나긴 사건의 수만 조각으로 쪼개진 시간 가운데 늘 언제나 그 순간이다. 문을 활짝 열고 웃으면서 그 애들을 집으로 들이던 순간. 신기하게도 애초에 중고 가구 판매 글을 올리지 않는다든가, 문을 아예 열어주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다. 그저 매번 문을 열어젖히고 그 애들을 집 안으로 들이던 그 순간으로 멍하니 되돌아가곤 한다. 남자애가 몹시 귀찮다는 듯, 대충 구겨 신고 있던 운동화를 벗어 던지고 들어서던 그때, 지수가 뒤에서 자기 손으로 문을 쾅 닫던 그때로. 현관문은 꼭 닫아야 한다고, 집 안은 늘 안전한 곳이고 저 밖에 있는 무언가가 더 위험한 거라고 배워왔으니까. 하지만 머릿속에서 다시 그리는 그림 속에서는 매번 그때의 자신이 보란 듯이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다. 지나가는 누구든 볼 수 있게, 필요할 때면 언제든 도움을 요청할 수 있게. “후회되는 일을 자꾸만 곱씹는다면, 머릿속에서 그때의 상황을 다시 한 번 대본으로 써보세요.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말이에요. 그리고 마음이 어떻게 변하는지 한번 느껴보세요.” 내담자들에게 자신이 해주던 충고였다. 후회되는 과거를 머릿속에서 완전히 새로운 대본으로 바꿔보라고. 그리고 다 끝났다는 마음으로 떠나보낸 뒤, 현재에 집중해 보라고.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전부 개소리였다. 나아지는 건 하나도 없었다. 머릿속에서 수백 번 문을 열어젖혀도 늘 결과는 똑같았다. 현관문을 닫고 돌아서는 순간, 돌변하던 그들의 표정. 지수의 머리채를 거침없이 휘어잡던 여자애의 야무진 손길과 주머니에서 조잡한 커터 칼을 꺼내 턱 밑에 들이대던 남자애의 잔인한 미소. 지갑을 통째로 넘기고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빌다가, 결국 초라한 면 속옷만 남기고 옷을 모두 벗은 채 팔로 몸을 가리고 벌벌 떨며 서 있던 자신의 모습. 굴욕적으로 터지던 핸드폰 카메라 소리. 깔깔대는 여자애의 웃음소리. “어머! 저 팬티 좀 봐! 할머니야, 뭐야?” “저런! 아는 사람인 줄 착각하셨구나.” “음…… 배달원인 줄 알았거든요.” 여자의 얼굴에 호기심과 당황, 그리고 비난이 뒤섞인 묘한 표정이 떠오른다. 들어온 강도는 남자였는지, 빼앗긴 건 돈뿐인지, 혹시나 몹쓸 짓이라도 당한 건 아닌지 궁금해하는 동시에 왜 경솔하게 낯선 사람에게 함부로 문을 열어줬는지 쓴소리하고 싶은 눈치였다. “아니, 그럼 어떻게…….” “겨우 밀치고 방으로 도망쳐서 문을 잠갔는데, 부수고 들어올 기세더라고요. 핸드폰도 없고, 어떻게 버틸 방법이 없는데 이미 얼굴을 봤으니 살려둘 리 없겠다 싶어서…….” “그래서?” “창문을 열고 확 뛰어내렸어요.” “아이고!” 여자가 진심으로 놀란 듯 두 손으로 입을 막으며 소리 질렀다. 굵직한 목소리가 카페 안에 울려 퍼지자, 주변 사람들이 돌아보았다. “우리 집이 3층이었는데, 병원에선 그래도 발목 철심 정도로 끝나서 운이 좋았다고 하더라고요. 허리였으면 평생 고생했을 거라며. 하하하하.” 커다랗게 울리는 자기 웃음소리를 들으니 조금은 안심이 됐다. 이만하면 오랜만에 만난 낯선 사람 앞에서 자연스럽게 행동한 것 같다. 그 정도 부상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그 뒤 1년간 친구의 요가학원에서 청소와 정리를 도와주며 숙식을 해결하고 있는 것도 별일 아니라는 식으로 가볍게 웃어넘겨 버렸으니까. 낮이든 밤이든 지독한 악몽에 시달리는 바람에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는 것도, 그 악몽을 머릿속에서 몰아내기 위해 열 달간 마약성 진통제와 술독에 빠져 폐인처럼 살았다는 것도, 이제야 정신 차리고 술을 끊은 지 겨우 넉 달밖에 안 됐다는 이야기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와, 나도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에는 명함도 못 내밀겠네.” 여자는 마주 웃는 대신,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암만 그래도 학원에서 어떻게 자요. 말도 안 돼.” “뭐, 지낼 만해요. 밤에는 안에서 문을 잠그면 친구가 퇴근하면서 밖에서 셔터를 내려버리니까 더 안전하기도 하고.” “에이, 완전 갇히는 거잖아요! 그러다가 아까처럼 불이라도 나면 큰일 나지.” “그러면…… 또 창문 열고 확 뛰어내리죠.” 말해놓고 보니 우스워져서 킥킥거렸지만 상대의 표정은 여전히 심각했다. “그래도 빨리 소송이든 뭐든 해서 돈 받고 이사해야지. 거기서 마냥 뭉갤 수는 없잖아요.” “그건 그래요. 바닥에 매트 깔고 자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허리 아픈 건 요가로도 해결 안 되더라고요.” 이번 농담에는 여자가 호탕하게 웃어주었다. 덕분에 조금 우쭐해졌고, 그래서 대화가 점점 더 길어졌다. “괜히 집주인하고 싸우기는 싫어서…… 그냥 조금 더 기다려보려고요.” “음.” 보증금을 떼이고 집도 절도 없는 주제에 태평하게 뭉개고만 있는 멍청한 여자처럼 보일까 봐 얼른 덧붙였다. “마음에 드는 집 찾으려면 발품을 많이 팔아야 할 텐데, 제가 지금은 그럴 정신이 없어서. 그리고…… 아직은 빈집에 혼자 있는 게 좀 무섭기도 하고요. 학원은 집 같지가 않아서 차라리 지낼 만하거든요.” “상담 같은 건 받아봤어요? 요즘은 그런 것도 많이들 하더라.” 제가 바로 그런 걸 하던 사람이에요. 그런데 내가 당하고 보니 미쳐나가는 데는 답이 없네요. “아아, 크게 도움은 안 되더라고요.” “그래도 혼자 버티는 것보다는 나을 텐데. 본가는요?” “거긴 그냥…….” “가족들 없어요? 애인은?” “지금은 없어요.” 지수는 난처한 듯 웃으며 말했다. “다들 멀리 살고, 별로 교류가 없어서요. 나와서 산 지 오래됐거든요.” “하긴, 독립해서 혼자 편하게 살다가 뒤늦게 가족들이랑 부대끼려면 적응 안 되지.” 꼬치꼬치 캐물은 게 미안했는지 여자가 얼른 말을 이었다. “맞아요.” “근데 또 여자 혼자 살면 가만히들 안 놔두잖아요. 여기저기서 간섭에, 관심에, 왜들 그렇게 오지랖이 넓은지 몰라. 혼자 조용히 좀 살겠다는데.” 손을 내저으며 흥분하던 여자가 갑자기 어깨를 움츠리며 킥킥댔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내가 이런 말 할 자격은 없네. 이것저것 캐물어 놓고.” 그 표정이 워낙 익살맞아서 지수도 같이 웃어버렸다. “아니에요. 다 맞는 말인데요, 뭐. 진짜 혼자서 안전하게 살 수만 있으면 더 바랄 게 없죠.”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유롭고, 아늑하고, 안전하고?” “네, 연예인들이 사는 데처럼 사생활도 보장되고, 보안도 철저한 그런 곳이요. 그런데 전부 꿈이죠.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지수가 고개를 숙이고 피식 웃었지만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분위기가 어색하게 가라앉았다. 이제 최선을 다해 끌어모았던 사교성이 마침내 바닥난 모양이다. 지수는 잔에 남은 커피를 마저 마시고 주섬주섬 일어날 채비를 했다. 다시 학원으로 돌아가서 탕비실 구석에 깔아둔 매트 위에 쪼그리고 새우잠이라도 청해볼 생각이었다. 아늑하진 않지만 적어도 안전한 곳이니 악몽을 꾸는 일은 없을 것이다. 바짝바짝 타는 목을 시원하게 축여줄 한잔은 계속 생각나겠지만. “잠깐!” 카디건 단추를 채우며 일어서는데 여자가 팔을 잡았다. 팔뚝을 전부 감쌀 만큼 커다란 손이 덥석 움켜쥐는 느낌이 묘했다. “저기, 내가…… 그런 데를 아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