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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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프타운
1화. 프롤로그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
_서양 속담
프롤로그
악마가 찾아왔을 때, 나는 세상을 발아래에 두고 있었다.
겨우 손바닥 한 뼘 너비 난간 위에 맨발로 올라서서 까마득히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는 말이다. 머리카락을 흩어놓는 살벌한 바람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쿵! 쿵! 쿵!
문 두드리는 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내게는 달리 선택지가 없다.
고통, 아니면 영원한 나락뿐.
쿵! 쿵! 쿵! 쿵!
문이 다시 울렸다.
더 세게. 더 다급하게.
더 빠르고 경쾌하고 잔인하게.
이젠 정말 시간이 없다.
나는 마지막으로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시고 허공으로 훌쩍 날아올랐다.
1부 연옥
1
“지옥 맛 좀 보셨나 봐?”
걸걸한 목소리가 물었다.
“……네?”
“아아.”
여자가 웃으며 턱짓으로 지수의 다리를 가리켰다. 내려다보니 형편없이 얇은 싸구려 요가복이 말려 올라가 발목의 끔찍한 자국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커다란 낚싯바늘을 통째로 집어넣었다 뺀 것처럼 길게 휘어진 갈고리 모양의 흉터.
“그 느낌 아니까.”
여자가 지수의 것과는 달리 피부처럼 착 달라붙은 고급 레깅스를 걷어서 자기 발목을 보여주었다.
“나는 없앤 지 이제…… 한 2년쯤 됐나? 지금은 멀쩡하지만 그땐 고생깨나 했지. 아니 겨우 뼈가 붙어서 좀 걸을 만하니까 또 철심을 빼야 한다고 입원하라네? 나 참. 아! 그래서 요 모양이 된 건 아니고요. 다 옛날 일이지.”
여자가 킥킥거리며 자기 배를 가리켰다. 키도 덩치도 엄청나게 큰 데다 배와 엉덩이에 몽글몽글 살이 붙어서 몹시 눈에 띄는 몸매였다. 바람을 한껏 받아 부푼 돛처럼 불룩하고 풍만한 가슴이며 유난히 커다란 손과 발도 아주 인상적이었다. 몇 번인가 요가 수업을 같이 들을 때마다, 그 덩치로 제법 유연하게 몸을 쭉쭉 늘이고 비틀어대는 게 신기해서 훔쳐봤던 기억이 난다.
평소라면 이런 대화가 반가웠을지도 모른다. 딱 적당한 곳에서 자연스럽게 만난 새 친구가 새출발을 위한 신호탄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좋지 않다. 복도에 한 줄로 서서 몸을 낮추고 자욱한 연기 속을 빠져나가는 동안 요란한 경보음이 귀를 찢을 듯 울어대고 있으니 남의 이야기에 신경 쓸 여유가 없다. 그저 빨리 나가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여기서 쓰러지면 안 돼.
시끄러운 벨 소리, 창문에서 새어 나오는 연기, 얼빠진 표정으로 건물 뒷마당에 모여 있는 사람들. 상가 건물 옆 길가에서 이쪽을 기웃거리는 구경꾼들이 보였다. 얇은 요가복 차림으로 급히 뛰어나온 여자들은 한쪽 구석에 모여서 팔로 몸을 감싸고 있었다.
“신고는? 신고했어요?”
뒷줄에 서 있는 누군가가 목청을 높이는 순간 갑자기 요란한 경보음이 그치고 사방이 고요해졌다. 덕분에 지수는 머릿속에서 쿵쿵 울리는 심장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날 이후 잦아든 적은 있어도 멎어본 적은 없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대고 있었다.
쿵! 쿵! 쿵! 쿵!
“아, 여러분, 괜찮습니다. 불이 난 게 아니에요!”
상가에서 나온 관리인이 소리쳤다.
“화재 비상벨이 잘못 울렸나 봅니다.”
“연기는 뭐예요, 그럼!”
요가복을 입은 여자 하나가 소리쳤다.
“누가 3층 비상구 창문에서 마른 꽃다발을 태웠나 봐요. 불씨는 꺼졌는데 연기가 엄청나서 벨이 울린 겁니다. 지금 환풍기 가동하고 있어요. 신고도 취소되었으니 다들 들어가세요. 이제 괜찮습니다.”
관리인이 목청껏 소리치자 불안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대로 넘어간다고? 맘먹고 불 지른 거면 어쩔 거야? 경찰에 신고해서 조사라도 해봐야지.”
“일 커지는 거 싫어서 그냥 쉬쉬할걸요. 건물주한테 보고도 안 할 텐데, 뭘.”
“어차피 오래된 상가라서 복도에 CCTV도 없잖아.”
“그러고 보니 스프링클러도 작동 안 했네. 이러다 진짜 사고 나면 큰코다치지.”
사람들의 불평이 귓전에서 허망하게 흩어졌다. 하지만 지수의 정신은 다른 곳을 헤매고 있었다. 982, 981, 980, 879, 아니, 979였나? 어디까지 셌지? 멈추지 마. 계속 숨을 쉬어.
“괜찮아요? 아휴, 요가하다가 골로 가는 줄 알고 십년감수했네. 아니, 이런 옷 입고 자빠져 있다가 발견되면 얼마나 쪽팔려.”
덩치 큰 여자가 지수의 팔을 잡으며 킥킥거렸다.
“도대체 어떤 미친 인간이 이런 짓을 했는지, 원. 아니면 애들이 장난쳤나? 4층에 보습학원 있잖아.”
아니, 그럴 리 없어. 그런 게 아니야. 그 인간이 다시 나타난 거다. 지수는 아직 길가에 서 있는 구경꾼들을 돌아보았다. 저 너머 어디선가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땀이 식으니까 슬슬 추워지네. 이러다 감기 들겠어요. 늦가을 감기 지독하거든. 얼른 들어가요. 내 차크라가 점점 오염되고 있어.”
여자가 눈치 없이 깔깔대며 팔을 잡아끄는 동안에도 지수는 내내 뒤를 흘끔거렸다. 목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시원한 한잔이 간절히 필요했다. 다 잊어버릴 수 있게 딱 한 잔만.